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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올바른 정치학 / 이운경

칠부능선 2022. 3. 1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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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올바른 정치학

- 노정숙, 피어라, 오늘(도서출판 북인, 2021)

 

 

이 운 경

 

 

 

1. 잘 숙성된 성찰의 산물

 

노정숙의 다섯 번째 수필집 피어라, 오늘은 현대수필의 전형典型과도 같은 책이다. 수필의 본질에 입각한 다양한 형식의 작품이 다 들어있다. 이는 저자가 수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수필쓰기를 이어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열매가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다. 역사 속 인물과의 대화, 여행기, 일상에서 길어 올린 삶의 일리와 철학,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생각, 짧은 수필과 실험 수필 등등. 현대수필은 이러한 것이다, 라는 명제에 대한 실전작품을 다 모아놓았다. 이 책은 등단 이력 2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필에 대한 쉼 없는 공부와 작업의 결과물이다.

노정숙의 사유는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다. 대상에 자아를 온전히 위탁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도 않는다. 주체의 입장을 처음부터 설정하지 않고 대상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몸을 뒤섞는다. 그 과정에서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을 적절하게 갈무리한다. 일방통행이 아닌 상호 대화적이다. 주제나 메시지도 한 가지만을 주장하거나 강조하기보다 중간 중간 점검하는 식이다. 목적 지향적이 아니라 과정 중심적이다. 주제라는 목적지를 향해 등산을 하지만, 산을 오르는 길에서 만나는 풀꽃이나 구름, 등산객과 다정스레 인사를 나눈다. 소살거리며 흐르는 시냇물 같은 어조와 문장이 편안하다.

피어라, 오늘이라는 표제를 오래 들여다본다. 앎과 깨침의 길은 사방에 널려 있다. 세상과 존재의 미로 곳곳에 숨어 있다가 아침 안개나 저녁 이내처럼 피어오른다. 예민한 감각과 밝은 눈이 있는 사람에게는 대상과 접속하는 매순간이 공부이다. 그러려면 매순간 깨어있어야 한다. 열린 감각과 유연한 사고로 수용자의 자세로 다가가야 한다. 노정숙의 수필은 세계와 자아가 대립하거나 각을 세우지 않는다. 삶이라는 강물에 자아를 던지고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소가 있으면 잠시 머물며 하늘을 쳐다본다. 이런 태도는 세상과 부대끼면서 깨친 삶의 지혜이면서 타고난 성정이기도 하다. 자아와 세계와의 행복한 연대를 위해 독서와 여행, 사람과의 만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세상을 향한 촉수와 자아 성찰의 팽팽한 긴장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벼린다.

 

나는 지조 없이 살기로 했다. 말랑말랑한 노인이 되는 게 내 꿈이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이쪽저쪽 좋은 것을 찾아 팔랑팔랑 귀를 세우고, 해본 것이 많아서 어떤 일에도 너 그러우며, 새로운 것에는 눈을 반짝이는 노인이 되고 싶다.

- 청춘과 꼰대에서

 

노정숙의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청춘의 감각을 지닌 성숙한 어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잘 숙성된 차 한 잔 마신 기분이다. 항아리 안에서 햇빛과 바람과 별빛과 이슬을 맞으며 발효의 시간을 충분히 견딘 깊고 깊은 발효차 같은 수필이다. 삶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조금 초연해진다. 아홉 번 덖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차 스스로 향이 깊어지듯이 충분히 발효한 생각이 독자에게 조용히 다가온다.

 

 

2. 선 채로 꾸는 꿈

 

수필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다. 낭만주의의 달콤함에 빠지면 삶의 실체가 흐려지고, 일차적 실용주의에 밀착하면 언어의 한계에 갇힌다. 한때 수필은 공중부양의 형상화로 문학성에 대한 열망이 한껏 고조된 시절이 있었다. 폭죽처럼 화려했지만, 허공에 그리는 관념은 난망했다. 체험을 진리의 발견이나 구원의 기별처럼 과도하게 포장하는 것도 위험하다. 그렇다고 지상에서 제자리걸음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기실 수필의 언어란 삶이라는 갯벌에서 벗어난 고양된 정신의 풍경을 보여주어야 한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언어와 감각을 적절하게 죄고 풀면서 안정적 목소리로 발화해야 한다.

 

먹구름 낀 하늘을 보며 곧 비가 올 것을 알아채는 일, 활짝 핀 저 꽃이 지고나면 연둣빛 이파리가 올라올 것을 아는 일, 거저 알게 된 이런 일들과 흙먼지 바람에게 눈길 주고 새 꽃 그대에게 귀를 여는 일, 내 안의 어린 나와 늙은 나를 어루만지는 일, 세상을 향한 창과 곡, 계획 없이 빠져버린 이런 일들을 풀어내 누군가의 가슴에 스며드는 일.

― 〈수필은 고백록전문

 

너무 높이 날면 거짓말이 된다.

너무 낮게 날면 세속적이 된다.

높이를 적당히 조절해야 격이 갖추어진다.

―〈샘물이며 갈증:나의 수필 작법 2에서

 

작품 은 수필의 개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메타수필이다. 짧은 글 속에 작가가 그리는 수필의 지도가 다 들어있다. ‘알아채는 일’, ‘아는 일’, ‘귀를 여는 일’, ‘어루만지는 일’, ‘가슴에 스며드는 일등 다섯 구절의 관용어구에 작가와 독자를 두루 아우르는 관용과 배려가 숨어 있다. 독백적 발화가 아니라 대화적 구조를 지향한다. 마치 뜨거운 물이 원두커피에 골고루 스며들어 향취를 내듯이 주체와 세계가 한 몸처럼 어우러진다. 자신의 체험을 언어로 표현하되 거창한 진리추구도 아니고 무리를 따라가는 배회의 글쓰기도 아니다. 세상을 향해 몸의 감각을 활짝 열고 소통하면서 그로부터 건져 올린 감흥을 독자들과 공유하겠다는 것이다.

작품 는 수필작법에 대한 견해를 밝힌 글이다. 작가 스스로 명명한 수필 창작법은 선 채로 꾸는 꿈이다. 선 채로 꿈을 꾸다니, 불가의 수도승처럼 직립해서 사유하겠다는 것인가. 누워서 깨달음에 이른 와불臥佛도 있건만, 도대체 선 채로 무슨 꿈을 꾸겠다는 건가. 거짓으로 포장하거나 세속적 허영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롯이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자의식이 또렷하다. 억지로 문학이 되려고 애쓰지 않고,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놀이에서 위로받고 놀이에서 힘을 얻는길을 주창한다.

무엇보다 과도한 수사학에 대한 열망이나 지적 허영이 없어 편안하다. 목소리는 나직하지만 발화에는 뼈가 있다. 이는 수필의 개념과 속성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수필의 좌표를 분명하게 설정한 후 자기만의 지도를 스스로 그려나간다. 그녀의 수필은 관념이라는 허공을 향하기보다 눅진하고 난감한 삶의 터전에서 적당한 높이로 비행한다. 본래 수필은 삶이라는 갯벌이 내장한 철학적 이치를 자연스럽게 건져 올리는 일이 아니던가. 도약에 대한 열망이 강할수록 착지가 불안하다. 반대로 현실에 너무 밀착하면 수다에 그친다. 다행스럽게도 노정숙은 자신의 사유와 언어가 어느 지점만큼 뛰어올라야 하는지 적확히 가늠하고 있다.

고공의 상상력을 펼치기에는 난망한 장르가 수필이다. 그렇다면 지상과 허공 어디쯤에 수필의 지평이 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노정숙에게 수필 쓰기란 실존적 존재로 늪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아를 위무하면서, 관습과 관념에 갇힌 세계를 해방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삶과 체험, 고백과 일상이라는 수필이 가진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되, 규범에 스스로 갇히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수필집 전반에 흐르는 온도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다. 적당한 온도와 높이로 내면에서 충분히 숙성된 언어로 생각을 나직이 펼친다. 노정숙의 수필은 긴장과 이완의 조화가 매력이다. 겉으로는 고요하게 흐르지만 수면 아래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맥놀이처럼 여운이 길다.

 

 

3. 수필의 올바른 정치학

 

현대수필의 한계로 자주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것이 사회학적 상상의 빈곤이다. 수필이 가진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고, 심화하는 개인주의의 영향이기도 하다. 각자가 마련한 밀실에서 자기만의 언어를 중얼거리는 자폐적 증상은 현대수필이 뛰어넘어야할 벽이었다. 칼럼이라는 소분화한 장르가 있긴 하지만,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에 갇힌 수필은 스스로 질식사할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는 자아와 사회와의 관계설정이다. 자의식이 지나치면 경직되기 쉽고, 무거운 자의식에서 벗어나면 환상으로 내달린다. 아니면 언론의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는 동어반복의 받아쓰기가 되기 때문이다. 노정숙은 자아 밖의 세상을 향해서 발을 내딛고 적절한 높이의 목소리를 고민한다.

노정숙의 수필집에는 역사와 사회에 관한 작품이 여러 편이다. 남명, 김굉필, 이용휴 같은 역사적 인물과 그들의 삶을 성찰하면서 자아를 되돌아본다. 그러려니처럼 당대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담담히 기술한 글도 몇 편 있다. 유명 정치인의 자살을 다룬 이별의 무게와 디지털 시대와 인간의 외로움에 관한 시간의 힘같은 작품도 있다. 한쪽으로 기울거나 편향된 시각이 아니라 죽음과 존엄, 문명과 소외, 늙음과 고독 같은 보편적 맥락 안에서 소재를 가져온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를 수필의 소재로 가져오는 것 자체가 절반의 실패를 전제로 한다. 현재 진행형 문제에 대한 총체적 진단과 객관적 판단이 어려운 까닭이다. 이런 연원으로 수필은 체질적 거부감을 내면화하면서 사회문제에 대하여 의도적 회피나 외면을 당연시 했다.

과도한 자의식은 존재와 의식의 사이를 어긋나게 한다. 나아가 둘 사이를 소외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정숙은 수필이라는 그릇에 역사와 사회를 잘 버무린다. 주목할 지점은 화자의 변증법적 사유이다. 대상에 대한 철저한 거리두기와 객관화를 통해 비판적 사유를 한다. 역사수필이 지루한 것은 상식적 지식을 뛰어넘는 해석이 어려운 까닭이다. 작가는 역사 속 인물의 사상과 행위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예찬하지 않는다. 가령 처사 남명의 삶에서 여성 인권에 대한 생각을 현재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한훤당 김굉필의 유적지에서 물질적 풍요 속에 소실되는 인간의 인품과 정신을 아쉬워한다. 이런 변증법적 사유를 거쳐 마침내 역사 속 인물이 남긴 정신적 유산을 현재화한다.

또 다른 작품 이별의 무게는 사회적 정치적 사건이었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에 관한 글이다. 작가는 이 사건을 자살이라는 철학적 명제로 전환한다. 진보적 인사들의 자살 사건과 작가의 부주의로 죽은 열대어.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자살에 대한 이론 등을 가져온다. ‘죽음의 타살성이라는 합의 지점에 이르러서는 이름 없는 이들의 침묵의 연대로 승화한다. 사회적 자살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무리 없이 견인하는 것은 탄탄한 지적 토대이다. 사회적 무게를 지닌 한 인간의 죽음을 정치적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존재론적 죽음으로 바라본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역량이 솟아오른다. 독서를 통한 죽음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사회 철학적 해석이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이밖에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얼룩과 그늘을 언급한 그러려니같은 작품에서도 사회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의 목소리가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어느 한쪽을 편들거나 적대시하지 않는 총체적 관점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판단유보의 자세를 취하지만 이런 태도가 회피나 변명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사회적 문제를 인간의 보편적 문제로 변경하고, 죽음을 사유하는 진정성을 객관적 상황에 접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건이나 인물을 개별성에 가두지 않고 보편의 차원으로 이동하여 해석하는 데 능숙하다. 아무리 옳은 주장도 날것은 위험하니까. 문제는 사회적 문제를 수필이란 그릇에 용해하는 방식이다. 이런 과정에서 작가의 감성과 역량이 드러난다. 요컨대 노정숙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수필의 위치를 설정하고, 수필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시대의 풍속도를 그리는 방식

 

수필은 개인의 삶을 중심으로 그리는 풍속화에 가깝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풍속화를 통해 18세기 조선이라는 시·공간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꿈을 엿볼 수 있듯이, 노정숙의 수필에도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삶과 생각이 풍성하다. 신풍속도에서는 개와 고양이를 자식처럼 기르는 신세대, 동물들과 소통하고 유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는 시대의 풍속을 통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애도 준비애통하지 않다등도 있다. 시간의 힘에서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따른 인간의 고독과 소외를, 2020, 재난일기에는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을 기록한다. 요컨대 시대의 전환기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삶을 담은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주목할 지점은 시대의 풍속도를 그리는 방식이다. 서사적 방식도 아니고 서정적 방식도 아니다. 관찰자의 시선과 주관적 서술자의 입장이 혼재한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냉정하고 객관적이다. 그다음 작가의 주관적 해석이 뒤따르는 방식이다. 그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다양하다. 책에서 얻은 지식, 영화나 다큐, 관계에서 체득한 경륜 등이 동원된다. 한 가지 이론이나 생각을 잣대로 삼지 않는다. 요모조모 따지고 뒤집어도 보면서, 자신에게도 성찰의 잣대를 들이대며 역지사지도 해본다. 한 방향을 지향하지 않고 자아의 안과 밖을 드나들며 둘을 잘 엮는다. 일상에서 부닥치는 사건이나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응대한다. 이런 개방적 태도는 타고난 천성이기도 하고, 삶이라는 강을 건너면서 구축한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여행과 독서, 문학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아를 확장하고 성장시켜온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논리나 이치에 맞지 않으면서 어른이라고 어린 사람을 무시하거나 윽박지르는 것을 보며 얼마나 분개했던가. 어른의 시각이 나이 숫자보다는 품성과 인품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세월을 거꾸로 사는지 낯을 붉힐 때가 잦아진다. 나이 들면서 둥글고 어진 말을 품어야 하는데 연륜이 벼슬인양 목소리가 커진다. 아직 푹 늙지도 않고 섣부른 어른 행세라니. ―〈, 에서

 

 

나는 나에게 너그럽기로 했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은 없다. 힘든 일에 부딪치면 이겨나가려고 애쓰기보다 한 발 물러선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밀려나고 나를 허락하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그것이 최선이라고 세뇌시킨다.

―〈내 자리 꽃자리에서

 

사는 일이 긴 줄넘기 놀이 같다. 빠른 판단과 순발력이 필요하다. 둥근 원 안으로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호흡을 야물게 맞춰야 한다. 큰 흐름에서 한번 이탈하면 다음 수순을 따라잡기가 힘들다. 순방향에서든, 역방향을 택하든 삶은 예전보다 길어졌다. 끝까지 잘 살아내려면 최후의 무기인 몸을 다스리고, 최고의 무기인 정신의 날을 갈아야 한다. 너무 날카로워 위험하지 않게, 너무 무디어 어리석지도 않게.

―〈그러려니에서

 

작품 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 기운과 영향력에 관한 글이다. 이 작품에는 인도영화 지상의 별처럼에 나오는 솔로몬 섬의 이야기’, 정약용의 품석정’, 나무를 베기 전에 고하는 말 등이 전면에 배치된다. 후반부에는 말의 파장과 진동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등장한다. 주제로 바로 직진하지 않는다. 여러 갈레의 오솔길을 걷듯이 다면적으로 두드리고 자아를 성찰한다. 밀실에서 독백조로 중얼거리지도 않고, 광장에서 큰소리로 외치지도 않는다. 강하게 주장하기보다 조곤조곤 설득하는 방식이다. 독자에게도 생각의 여지를 부여하면서 주체의 권한을 양보한다. 작가의 열린 감성의 흐름과 지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작품 는 작가가 견지하는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흑백논리의 대결을 넘어서는 합의 자리에 이르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경쟁 속에서 경쟁이 아닌 듯, 무디게 사는 것의 지혜를 통해 스스로를 다스리고 한 발 물러서는 지혜를 추구한다. 이 작품에도 입시실패 경험과 동물의 왕국다큐멘터리, 다재다능한 친구 정수가 등장한다. 해석부분에 들어가면 붉은 여왕의 효과와 동물세계의 진화가 나온다. 한 길로만 직진하기보다 다양한 화소를 동원하여 신중하게 접근하며, ‘정신적 성숙이라는 최종 심급에 이르는 과정을 솔직하고 섬세하게 보여준다. 세계와 대립하거나 날을 세우기보다 이해하고 화합하려는 작가의 태도를 만날 수 있다.

작품 은 사회성이 강한 작품이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부의 세습, 해고 노동자 문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 등 첨예한 사회문제를 가져온다. 화자의 촉수에 걸린 가족 안의 문제에서부터 사회적 문제까지 나열한다. 병렬식으로 이어지는 화소들은 문제제기 그 자체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수필은 사회적 문제의 해결 방안까지 제시할 의무는 없다. 수필가의 시선과 감각으로 느끼는 불편함이나 통증, 분노를 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문학은 화려한 도시의 뒷골목의 그늘과 얼룩, 남루한 삶을 견디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수필이 설 자리가 어디인가를 잘 보여준다.

노정숙은 한길만 고집하지 않는다. 주제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화소를 가져와 문맥을 연결하고 녹여내면서 마침내 의미를 길어 올리는 방식이다. 살아보니 삶의 지형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체득한 탓이리라. 여러 갈레의 길을 두드리고 맥락을 찾아가면서 조심스레 자신의 목소리를 펼친다. 그래서 구성이 단조롭지 않다. 비유컨대 다양한 색상과 종류의 채소들을 가져와 접시에 담고 나만의 소스로 맛을 낸다. 이런 방식의 배치는 수필이 가진 단조로움을 뛰어넘는다. 약간의 변화를 주지만 그 효과는 상당하다. 둥근 달항아리의 면을 깎아 입체성을 추구하듯이 형식의 변화는 존재 방식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주목할 다른 한 가지는 열린 결미이다.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사건이나 현상을 이리저리 살피고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다듬는다. 처음부터 결론을 정하고 달려가는 스타일이 아니다. 한 걸음씩 내딛고 양보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확보한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삶의 일리一理를 추구하지만, 사유하는 방식이 철저히 변증법적 방식을 고수한다. 직선적 방식이 아닌 다면적으로 살피고 사유하고 열린 결미를 지향한다. 타자에게 자아를 양보한 자리에 너그러움과 여유와 지혜를 채운다.

노정숙 수필은 안으로 팽팽하고 밖으로 느슨함을 지향한다. 하거나 범람하지 않는 감성, 긴장(짧은 수필)과 이완(긴 수필)을 자유롭게 배치하는 능력, 다양한 화소를 끌어들인 입체적 구성, 주체의 목소리를 줄이는 열린 결말 등. 작가는 직선의 길만을 걸어갈 수 없는 관계의 복잡성과 삶의 지난함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정치와 사회, 개인과 사회적 존재, 현재적 인간과 역사적 인간 등으로 끊임없이 이동한다. 공간의 이동도 빈번하다. 집안과 집 주변의 탄천과 그리스, 동피랑과 바이칼 등으로 종횡무진이다. 이처럼 노정숙 수필의 영토는 광활하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걷노라면 중세 도시의 오래된 골목길을 걷는 듯 흥미진진하다.

노정숙의 수필은 유니크unique하다. ‘유니크하다는 말은 대범해 보이기도 하고, 일면 소심해 보이기도 한다는 말이다. 안으로 다져진 지성의 내공이 가볍지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작가이다. 감정을 절제하고 논리를 조율하는 과정을 통해 정신적 성숙을 추구하는 태도는 수필의 본령과 맞닿아 있다. 안과 밖을 자유로이 드나드는 개방성과 일상성의 보수주의에 머물지 않는 감각 체계는 노정숙의 스타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수필의 개성이란 개별의 특이성이 전체의 보편성으로 이어지는 접경지대에서 발생한다. 이 접경지대에서 발현하는 사유의 문양이 다채롭다. 무엇보다 실팍한 지식이 논리와 주장을 뒷받침한다. 요컨대 노정숙은 우리 수필문단의 취약 지대인 지성수필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 수필미학2022 봄호 (통권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