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장석주
시력 50년 장석주의 시선집, 고급진 장정이다. * 어쩌다 시를 쓰게 됐을까? 이른 나이에 시에 노출된 환경 탓이었을까. 외톨이 소년의 외로움 탓이었을까? 나를 시로 이끈 것은 내 안의 뾰족하게 내민 우쭐한 기분이거나 사춘기의 영웅 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시가 내 차가운 이마를 콕 찍어 호명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어느 날 내 안에 시의 싹이 조그맣게 돋아났으니 그건 우연의 일이고 신기한 사건이었다. 시는 눈썹, 광휘, 계시이다. 시는 늘 걸음이 빨라 나보다 앞서갔다. 저만큼 앞서가는 시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모름 속에서 모름을 견디며 꾸역꾸역 시를 썼으나 시에 목숨을 건 듯 살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삶으로 시를 빚지 않고, 시로 삶을 빚지 않고, 시로 삶을 빚은 듯하다. 그동안 시가 내 몸을 관통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