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라그랑주점 / 이상수

칠부능선 2023. 1. 10. 16:56

이상수 수필집, 장정이 깔끔하다. 왠지 자신감 넘쳐보인다.

글을 쓰는데 연식이 깊이나 넓이를 좌우하지는 않는다.

빛나는 건 처음부터 빛난다. 긴 시간 갈고 닦아서 빛나는 것도 있지만...

오랜 준비를 마치고 수필 동네에 입성했다. 드러난 시간보다 더 오랜 담금질이 글에서 느껴진다.

몰랐던 정보도 신선하다. 좋은 수필을 계속 쓸 기대감에 든든하다.

- 작가의 말

마침내 여행이 시작되었다.

쓸쓸한 운동화의 시간을 신고

바람과 구름과 햇살과 비를 좇아간다.

더욱 혼자가 되겠지만,

작은 봇짐 속에 꽃 한 송이 있다면

더 이상 외롭진 않을 것이다.

                                           2022년 가을 이상수

* 수더분한 외모를 보고 주위에선 나를 편한 사람으로 오인한다. 그러나 조금 지내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원칙에 어긋나는 것을 따르지 않으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싫어한다. 무엇보다 대가를 치르고도 정당한 권리를 찾지 못하는 걸 참기 어려워해 단체에서는 별로 내켜 하지 않는 타입니다. (53쪽)

*8월 10일은 '세계 사자의 날'이자 '게으름의 날'이다. 아프리카 평원의 여름은 말 그대로 이글이글 끓는 듯한 용광로 속이다. 그 뜨거운 날씨 속에서 사자는 하루에 대략 18~ 20시간 정고 자는데, 때로는 24시간 내리 졸기도 해서 이런 이름이 붙였다. 아마도 사자는 다음 사냥을 위해 카푸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리라. (129쪽)

* 슬픔의 눈물은 산성으로 인해 쓰고, 기쁨의 눈물엔 나트륨 성분이 적어 달단다. 동정의 눈물엔 칼슘이 들어있어 맺히기만 하고 이별의 눈물은 프로틴이 적어 잘 마른다고 한다.어쩌면 사람에 따라 흘리는 눈물의 성분은 서로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론 타인의 슬픔이 자신의 절망을 이기는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33쪽)

* 보내미는 예비 밭갈이를 말한다.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기 전, 겨우내 외양간에 웅크리고 있던 소가 건강한지, 작년에 쓰던 쟁기 줄은 삭지 않았는지 밭을 갈며 미리 점검해보는 것이다. ...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글쓰기에도 만만찮은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꼼꼼하게 자료를 모으고 튼튼한 글 뼈를 잡아야 한다. 그 바탕 위에 설명과 묘사를 하고 퇴고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이윽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할 수 있다. ...

 봄이 되면 겨울잠 자는 벌을 번식시키기 위해 화분떡을 올리고 깨우는 일이며, 거름을 내고 종자를 준비하는 것도 일종의 보내미에 속한다 할 것이다. ...

 이제 나도 본격적으로 글밭을 갈려 한다. 묵은 가지도 걷어내고 밑거름도 주어 제대로 된 튼실한 글을 수확하길 꿈꾼다. 소와 함께 밭으로 나가는 아버지처럼.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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