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 21

수필의 올바른 정치학 / 이운경

수필집 자세히 읽기 수필의 올바른 정치학 - 노정숙, 《피어라, 오늘》 (도서출판 북인, 2021) 이 운 경 1. 잘 숙성된 성찰의 산물 노정숙의 다섯 번째 수필집 《피어라, 오늘》은 현대수필의 전형典型과도 같은 책이다. 수필의 본질에 입각한 다양한 형식의 작품이 다 들어있다. 이는 저자가 수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수필쓰기를 이어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열매가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다. 역사 속 인물과의 대화, 여행기, 일상에서 길어 올린 삶의 일리와 철학,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생각, 짧은 수필과 실험 수필 등등. 현대수필은 이러한 것이다, 라는 명제에 대한 실전작품을 다 모아놓았다. 이 책은 등단 이력 22년이라는 긴 세..

산문 - 필사 + 2022.03.14

우울감 동지

후배들이 톡에 올린 글이다. " 하루 사이 10년은 늙은 것 같아요 " " 나 산으로 들어갈테니 찾지 마세요 " " 일이 손에 안 잡히고 기운이 없어요 " " 한심해서 화가 나요 " " 대학생 딸이 많이 울었어요 " 나도 며늘에게 전화했다. " 다 울었니? " 11일, 진*씨가 통화를 하다가 답답하다고 우리집에 왔다. 서리태 죽으로 점심을 먹고 진*씨는 와인 한 잔, 나는 세 잔. 폭풍 수다하며 탄천도 걷고, 7천보란다. 하루치 건강도 챙겼다. 12일, 84세 선배님 생신을 당긴 3인 모임. 토욜이라 차 밀릴 것을 염려해서 멀리 안 나가고, 롯데백화점에 새로 생긴 '라그릴리아'에서 점심, 파스타와 피자, 시저셀러드, 스파게티... 커피까지 마셨으니 과식이다. 선배님이 귤이 먹고 싶다고 해서 우리집으로 왔..

믿었던 사람 / 이덕규

믿었던 사람 이덕규 믿었던 사람 속에서 갑자기 사나운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 나에게 달려들었다 개는 쓰러진 나를 향해 한참을 으르렁거리다가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믿었던 사람이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우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조금 전 당신 속에서 뛰쳐나왔던 그 개는 어디로 갔느냐고 되묻자 믿었던 사람은 가슴을 열고 더 무서운 개 한 마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개 말이오? 나는 결국 사람에게 지는 사람이다 나는 늘 사람에게 지면서도 그 흔한 위로의 반려견 한 마리 키우지 못하는 것은 오래전 내 안에 키우더 자성의 개 비린내 나는 송곳니에게 호되게 물렸기 때문이다 견성한 개는 주인을 물어 죽이기도 한다 내가 키웠던 개들은 매번 주인을 물어뜯는 개로 자라서 나는 나에게도 지는 그런 슬픈 사람이다

시 - 필사 2022.03.13

5천 원과 5만 원 / 노정숙

5천 원과 5만 원 노정숙 조*자 님이 문우 셋과 만났다. 중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자꾸 두리번거린다. 홀 서빙을 하고 있는 한 청년을 부른다. 다정한 말씨로 “내가 지금 이곳 사람들을 살펴보니 자네가 참 열심히 일을 하네. 자네는 앞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걸세.” 대강 이런 말을 하며 신권 5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넨다. 청년은 꾸벅 인사를 한다. 모르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기 위해 항상 5천 원짜리 신권을 얼마간 준비해서 다닌다. 전에는 운전을 했고, 한동안은 기사를 대동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외출이 잦지 않으니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70대 그의 배낭 안에는 늘 선물이 가득하다. 특별한 떡이나 참기름, 양말 등 만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을 넣고 나온다. 팬데믹이 있기 전, 문학행사에도 그냥 가는..

용재총화 / 성현

500년 저 너머 사람 성현(1439~1504)의 글이다. 세종 연간에 태어나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세 임금을 차례로 모시며 높은 벼슬을 했다. 방대한 지식과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비평가, 탁원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로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용재총화』는 일곱 개의 장으로 먼저 남녀 간의 애절한 사람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인물의 일화 및 점잖고 근엄해 보이는 사대부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았으며, 호기가 넘치는 영웅과 지사의 일화, 백성의 해학이 담긴 민담과 소화, 오싹하고도 가엾은 귀신 이야기를 담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역사와 풍속 이야기를 담았다.' 역자의 소개는 거창하나 그야말로 문학적 장치 없는 옛날이야기다. 같은 글을 어찌 해..

놀자, 책이랑 2022.03.09

근본 없다는 말 / 김명기

근본 없다는 말 김명기 마당가 배롱나무 두 그루에 꽃이 한창이다 한 그루는 장날 뿌리째 사다 심었고 한 뼘쯤 더 자란 나무는 가지를 베어 꺾꽂이했다 뿌리째 심은 나무는 사방 고르게 가지를 뻗어 꽃 피우고 베어 심은 것은 뿌리내리며 가지를 뻗느라 멋대로 웃자랐다 그중 제일 먼저 뻗은 가지는 땅을 향해 자란다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을 힘 다해 살았겠지 기댈 데가 없다는 건 외롭고 위태롭다 죽을 수가 없어 죽을 힘 다하는 생 뿌리가 얼마나 궁금했으면 아직도 땅을 향해 자라날까 무심코 내뱉는 근본 없다는 말에는 있는 힘 다해 뿌리내리며 허공을 밀어 올리는 수없는 꺾꽂이 같은 삶이 깊숙이 배어 있다

시 - 필사 2022.03.05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 이어령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이어령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운율은 출렁이는 파도에서 배우고 음조의 변화는 더 썰물과 밀물을 닮아야 한다. 작은 물방울의 진동이 파도가 되고 파도의 융기가 바다 전체의 해류가 되는 신비하고 무한한 연속성이여 시의 언어들을 여름바다처럼 늘 움직이게 하라 시인의 언어는 늪처럼 썩는 물이 아니다. 소금기가 많은 바닷물은 부패하지 않지만 늘 목마른 갈증의 물 때로는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갈증을 겨디며 무거운 짐을 쉽게 나르는 짐승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시 - 필사 2022.03.05

시간과 속도

20대는 20킬로로 달리고, 60대는 60킬로로 달린다는 말은 맞다. 하루하루가 아닌, 한 주일 단위로 살고 있다. 한 주일이 뭉텅뭉텅 지나간다. 월욜, 자임네 부부와 자임 생일 점심을 거하게 먹었다. 우리동네 '취영루'에서 코스가 아닌 요리로만. 이렇게 주문하니 음식이 모두 맛있다. 스벅에 가서 커피까지. 옛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푸근하다. 같은 시간을 가까이서 건너온 사람들만의 공감대가 있다. 헤어지고 오는 길에 자동차 정기검사를 받고. 화욜, 자임과 둘이 번개팅. 모자를 샀다고 전해주러 왔다. 이매역에서 만나 또 서현역으로 가서 모밀국수와 만두로 점심을 먹고, 또 커피 후 탄천으로 걸어왔다. 덕분에 걷기까지. 수욜, 봄학기 첫 수업이다. 새 회원이 한 명 들어왔다. 14명 정원이니 대기자가 많다고 ..

김선우의 사물들 / 김선우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 3시까지 읽었다. 잠이 오면 좋고, 잠이 오지 않아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니 좋다. 가끔 떡실신도 하니 걱정할 건 없다. 눈이 너무 아플때는 책 읽어주는 유튜브를 틀어놓고 눈 감고 있으면 어느새 잠들고 ... 오래 전, 내가 문단에 입문했을때 오선생님 따라서 간 명동 어딘가에서 '해외이주민을 위한' 공연에서 김선우 시인을 만났다. 문인과 가수의 콜라보다. 그때 해외에서 노동자들이 막 들어올 때였다. 고은 시인과 이야기 하면서 중간 중간에 가수 이은미가 노래를 했다. 그때 사회를 보던 까칠한 시인의 모습, 이은미의 품 너른 성품을 느꼈다. 대담은 아슬아슬 했고, 노래는 좋았다. 그래, 김선우 시인도 아주 젊을 때다. 이 책을 보니 그간 흐른 시간이 느껴진다. 민감함은 여전하지만 많이 ..

놀자, 책이랑 2022.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