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 19

미풍해장국 / 오성일

미풍해장국 오성일 사무실 앞 미풍해장국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제 밤부터 불이 꺼져 있더니 오늘 낮까지 문이 잠겨 있습니다 문 닫힌 한낮의 식당 안을 들여다보는 건 왠지 섭섭하고 걱정이 드는 일입니다 해장국의 뜨뜻하고 뿌연 김이 가라앉은 식당에선 유리문 사이로 서러운 비린내 같은 게 새 나옵니다 옆 건물 콜센터의 상담원 처녀들이 늦은 밤 소주 댓 병과 함께 뱉어낸 고객님들의 안다구니와 욕지기들도 식당 바닥 찬물 위에 굳은 기름으로 떠 있습니다 의자와 정수기와 도마와 탁자와 계산대는 다들 앞길이 막막하다는 표정으로 그늘 속에 반쯤 얼굴을 묻고 있습니다 나는 젊은 주인 내외가 무슨 상이라도 당했으려니 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너무 슬픈 나머지 쪽지 하나 붙이고 가는 일 깜빡했으려니 짐작하면서 하루 이틀 더 기다..

시 - 필사 2022.03.29

나쁜 시절 / 류근

나쁜 시절 류근 10년씩 배경을 뛰어넘는 드라마처럼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으면 좋겠네 숙취에 떠밀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한 국자 비워져 버린 간밤의 기억처럼 시간이 그렇게 큰 걸음으로 풍덩풍덩 달려가 줬으면 좋겠네 내게로 쏟아져 내리는 미분의 시간들 아침에서 저녁으로 이르는 길이 천축보다 멀고 밤마다 시간이 떨어뜨린 눈썹이 죽은 모래의 뼛조각으로 떠밀려 가네 한 시절 건너가는 일이 거미줄을 밟고 가듯 허공에 발자국 새기는 일처럼 아득하여서 내 절망은 적분 같은 것이네 죽는 날까지 한순간도 빠짐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 시간이 쪼아대는 부리를 견디며 살아남는 것만이 희망인 목숨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 건너가는 것만이 구원인 목숨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두어 달쯤 앞당겨 잘못 찢어낸 달력처럼 짐짓 빈 정류장을 지..

시 - 필사 2022.03.29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에릭 와이너가 기차여행을 하면서 철학자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부터 몽테뉴까지 섭렵한다. '빌브라이슨의 유머와 알랭드 보통의 통찰력'을 가진 매력적인 글솜씨라는 에릭 와이너, 그를 처음 만난 나는 시작보다 뒤로 갈수록 많은 포스트잇을 붙이게 되었다. *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마을에 정착시켰고, 철학을 사람들의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 ...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의 사상' 같은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의 사고방식만이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수단만 있을 뿐, 그 끝은 없었다. (51쪽) * 소로가 받은 혹독한 비난은 주로 위선에 관한 것이다. 소로는 숲속에서 홀로 자족하는 척하면서 몰래 엄마 집에 들러 파이를 먹고 빨래를 ..

놀자, 책이랑 2022.03.27

새 숨

곱게 단풍 들어 데려온 초설. 푸르고 푸르게 있더니 여리여리 연둣빛 새 순을 올렸다. 생명의 기척이 기특해 자주 들여다본다. 숨탄것들 이리 치열한데, 속시끄러운 마음을 홀로 삭혀야 한다. 내 속시끄러움이 세상에 아무 힘이 되지도 못하면서 왜이리 막연한 불안함이 ... 잘 되겠지....... 낙관이 어렵지만 내 특기가 낙관 아닌가. 생명을 이어가는 어여쁜 얘들에게 배운다. 다소곳이 내 안에서 자가 거풍, 거풍~ 핑크 수국을 오래 즐기고, 꽃대를 자르고 베란다에 두었더니 이리 튼실한 잎이 올라온다. 반갑다 수국~ 죽은 듯 있던 담쟁이도 봄기척을 했다. 이 어엿한 생명이라니. 여리여리 연둣빛 싹을 올리는 초설을 베란다 밖 화분걸이에 올려 햇빛에 가까이 두니 색이 이리 변한다. 새부리 쫑곳 새우고 빛을 받아모신다.

맹렬한 하루

수욜, 수필 수업이 끝나고 4인이 양재동 맛집으로 출동. 20분 정도 기다려서 자리에 앉았다. 모밀 전문점이다. 포식을 하고 옆 옆집 카페로. 양재동 꽃시장을 돌며 흠뻑 눈호사하고 집에 데려온 애들 봄은 후리지아 향으로 온다 흰색 호접란은 언제나 옳다. 흰색 게발선인장, 안녕 ~~ 착한 가격 오처넌. 카랑코에........... 얘는 덤으로 줬다. 공짜!

무죄 / 오정순 디카시집

초대회장인 오정순 선배의 출간 소식을 듣고 바로 주문했다. 저녁에 주문했는데 새벽에 문앞에 와 있다. 알라딘 총알배송이다. 단숨에 읽었다. 순간포착에 영성 깊은 시가 어우러져 여운이 깊다. 끊임없는 열정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25년 인연, 내 시작 모습을 다 기억해주는 선배다. 내가 등단했을때 불러서 집밥을 해주고, 선물 상자를 줬는데... 그때 카드로 쓸수 있는 멋진 사진과 고운 선물 봉투들, 빼곡한 축하와 덕담들... 그야말로 보물상자를 오래오래 썼다. 감동의 순간이 문득 문득 떠올랐다. 내 책 나올 때마다 불러서 근사한 곳에서 밥을 사주고 선물도 많이 받았는데...

놀자, 책이랑 2022.03.22

2022 화랑미술제

수욜, Vip 프리뷰에 갔다. 수필반 수업 끝나고 5인이 함께 점심 먹고 차 마시고 차 두대로 갔는데 학여울역을 바라보며 40분 넘게 기다리다 주차를 했다. 다음에는 지하철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 많은 예술세계를 바라봤지만, 푹 빠질 겨를은 없었다. 어쩌면 이리 다양한지. 예술에서의 사실과 상상력을 거듭 생각했다. 오늘 수필반에서도 봄호에서 '4인 4색'을 만났다. 그냥 결국은 따뜻한 정서로. 예술의 고지는 '상상력' ?

그림 동네 2022.03.17

수필의 올바른 정치학 / 이운경

수필집 자세히 읽기 수필의 올바른 정치학 - 노정숙, 《피어라, 오늘》 (도서출판 북인, 2021) 이 운 경 1. 잘 숙성된 성찰의 산물 노정숙의 다섯 번째 수필집 《피어라, 오늘》은 현대수필의 전형典型과도 같은 책이다. 수필의 본질에 입각한 다양한 형식의 작품이 다 들어있다. 이는 저자가 수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수필쓰기를 이어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열매가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다. 역사 속 인물과의 대화, 여행기, 일상에서 길어 올린 삶의 일리와 철학,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생각, 짧은 수필과 실험 수필 등등. 현대수필은 이러한 것이다, 라는 명제에 대한 실전작품을 다 모아놓았다. 이 책은 등단 이력 22년이라는 긴 세..

산문 - 필사 + 2022.03.14

우울감 동지

후배들이 톡에 올린 글이다. " 하루 사이 10년은 늙은 것 같아요 " " 나 산으로 들어갈테니 찾지 마세요 " " 일이 손에 안 잡히고 기운이 없어요 " " 한심해서 화가 나요 " " 대학생 딸이 많이 울었어요 " 나도 며늘에게 전화했다. " 다 울었니? " 11일, 진*씨가 통화를 하다가 답답하다고 우리집에 왔다. 서리태 죽으로 점심을 먹고 진*씨는 와인 한 잔, 나는 세 잔. 폭풍 수다하며 탄천도 걷고, 7천보란다. 하루치 건강도 챙겼다. 12일, 84세 선배님 생신을 당긴 3인 모임. 토욜이라 차 밀릴 것을 염려해서 멀리 안 나가고, 롯데백화점에 새로 생긴 '라그릴리아'에서 점심, 파스타와 피자, 시저셀러드, 스파게티... 커피까지 마셨으니 과식이다. 선배님이 귤이 먹고 싶다고 해서 우리집으로 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