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7 4

인간이 그리는 무늬 /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 멋대로 해야 잘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이념을 정해 놓고, 그것을 보편적이라거나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하면서 기준으로 사용하는 일은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폭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치론적 기준을 근거로 해서 세계와 관계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지요. 중국의 철학자 노자가 보기에 모든 가치는 중립적입니다. 그런데 공자에 따른 문명은 어떤가요. 禮라고 하는 특정 교화체계를 저기 높은 곳에 걸어 놓고, 백성들을 모두 거기에 통합시키려고 하지요. 통합적 욕구가 발산하는 이런 가치를 진정한 가치로 아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노자가 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노자는 기준이 비록 선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행사되는 한 폭력을 잉태하는 장치일..

산문 - 필사 + 2021.06.07

통 큰 아내 / 권영옥

통 큰 아내 권영옥 빼내다와 관계되는 연상 언어에는 진절머리가 들어 있다 참나무 뿌리와 뿌리 사이에 작은 바위가 끼어있어 죽어가는 노인의 억지 과신처럼 아내의 발부리가 시커멓게 주저앉는다 뽑아내고 빼내야 한다는 한 생각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고통은 죽음과 연결된다는 걸 안다 함백산 아랫동네에 사는 노인이 겨울을 나는 동안 눈바람이 되셨다. 영정 앞에는 가족과 가족의 합의 없이 만난 한 여인이 다리를 뻗친 채 울고 계신다. 여기에 오기 전 그녀는 참나무에 제 식의 조등을 걸어놓고, 붉은 가넷반지 위에 검은 눈물을 떨어뜨리셨다. 느슨해진 부부 속에 끼어들어 그녀가 화염방사기로 한 가슴을 새까많게 태우셨다 빈소의 촛불이 광기로 출렁이던 그때처럼 이글이글 한 지점을 향한다 불나방의 굴광성을 본 아내는 바닫을 꽉..

시 - 필사 2021.06.07

육감 / 이정록

육감 이정록 출발점이 중요하다며 아빠는 우리 관계를 무시한다 첫 만남이 수준 떨어지게 오락실이 뭐냐며 피시방이라고 게임하다가 만난 게 아니라 수행평가 때문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이상한 눈으로 혀를 찬다. 아빠는 한 핏줄이라서 육감적으로 안다며 용돈이 넘쳐나서 오락실까지 다니다고 엄포를 놓는다. 살이 맞닿는 우산 하나로 엄마를 꼬신 아빠는 육감부터 사랑일 시작된 까닭에, 그때 그 짜릿한 감촉이 이성 교제의 잣대가 됐다. 다 너를 위해서 충고한다는, 라떼는 비닐우산처럼 뒤집히지도 않는다. 하여튼 출발점이 중요하다. -웹진 《문장》 2021년 6월호

시 - 필사 2021.06.07

미리 생일

담주 내 생일을 당겨서 토욜 식구들이 모였다. 아들네는 숙성회, 딸네는 회, 아구찜을 준비해 왔다. 며늘은 물김치를 담아오고, 화장품과 건강식품을 잔뜩 가져오고, 딸은 샌들을 선물했다. 맘에 쏙든다. 아들은 피곤해서 입술이 부르트고, 며늘은 내일 부산 놀러간다고 해서 일찍 보냈다. 비건인 아들내외가 가고, 지난 번 선물받은 오겹살을 구워 다시 술판이 벌어져 우리는 와인 1병, 사위는 소주3병을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며늘이 주문해 온 케잌, 거듭 축하받고, 블루베리 케잌이라 맛도 좋다. 태경인 밤에 엄마한테 잔소리 듣고 운다. 덩치는 산만한데 마음은 여리다. 이제 억울한 일 있으면 울지말고 소리를 지르라고 했더니, 시경이가 형이 저한테 소리 많이 지른다며 안된다고 한다. ㅋㅋ 딸 친구가 보낸 꽃다발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