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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는 일 / 하태성

국경을 넘는 일 하태성 불가리아에서 세르비아로 가는 국경 길게 늘어선 입출국 검문소에서 총을 든 국경수비대의 눈빛은 삼엄하다 승용차 밖으로 여권을 내밀었다 죄를 지은 것도 없고 잘못 살아온 것도 아닌데 심장이 벌떡이고 손이 떨렸다 여기서 잘못되면 돌아가지도 못하리라 스산한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오는데 좁은 통로에 난데없는 누렁이 한 마리 어슬렁거리며 국경을 넘는다 불가리아에 있는 강아지에게 젖 물리고 세르비아 국경수비대에 몸을 비벼댄다 여권 없이도 국경을 넘나든다 사람들이 가로질러 놓은 경계는 개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개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선이다 개들에게만 있는 권리이다 오로지 사람들에게만 있는 여권 오로지 사람들에게만 있는 국경 오로지 사람들에게만 있는 분단 나는 단 한 번도 걸어서 국경을 넘던 기억이 ..

시 - 필사 2021.06.04

진부한 시 / 하태성

진부한 시 하태성 아내는 내 시가 진부하다고 한다 밥 먹다가도 티브이를 보다가도 젊은 사람드의 정서와 맞지 않다고 영화를 보다가도 타박을 늘어놓는다 60년대 농촌 이야기라고 70년대 공장 이야기라고 삶의 질이 바뀌고 생활이 윤택해졌는데 아직도 잘린 손가락과 공장에서 쫓겨난 이야기뿐이라고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인데 정보의 바다를 건기도 헤엄치기도 버거운데 아직도 진부한 노동자의 이야기와 농부들의 이야기뿐이라고 돈만 있으면 두 시간이면 서울에서 부산을 가고 유럽도 별나라도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 아직도 잘린 손가락과 해도당한 노동자 얼굴 그려가며 귀동냥 풍월로 남의 이야기만 시대의 양심처럼 오래한다고 돈도 되지 못하고 시대의 양심은 더더욱 되지 못하는 잘려나간 손가락이 없어지고 해고 위협에..

시 - 필사 2021.06.04

사람들에게 묻는다 / 하태성

사람들에게 묻는다 하태성 작가회의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내 친구 '이설야' 시인은 작가가 되기 위해 잉크젯 프린터 두 대를 작살내며 열심히 시를 썼다 신인상 시상식에서 시인이 되려면 그렇게 하라고 치열하게 글 쓰라며 고마운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잉크젯 프린터 두 대를 작살내고 신인상에 당선 되는 세월 동안 나는 두 번 이혼하고 세 번 결혼했다 그녀가 자판 앞에서 수려한 탈고를 하는 돌안 내 인생은 어수룩한 문장처럼 두 번 탈바꿈되었고 세 번째 인생 또한 흐릿하다 사람들에 묻는다 누가 더 치열하게 살았나? 누가 더 詩的으로 인생을 노래했는가? (시집 에서)

시 - 필사 2021.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