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신간은 '늙기의 즐거움'으로 시작한다.
삐그덕거리는 육신을 고쳐가면서 느끼는 비애보다는 담담함으로, 정신은 여전히 쨍하다.
그럼에도 맵고 날카롭게 말하길 저어하는 느낌이 들었다. 세월이 그런 것이라는 쓸쓸한 자각까지.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차며, 허송세월로 바쁘다신다.
노인, 말년하지만 여전히 시니컬하다.
* 내가 좋아하는 술은 위스키다. 위스키의 취기는 논리적이고 명석하다. 위스키를 몇 방울 목구멍으로 넘기면 술은 면도날로 목구멍을 찢듯이 곧장 내려간다. 그 느낌은 전류와 같다. 위스키를 넘기면,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그 전류의 잔잔한 여파들이 몸속으로 퍼진다. 몸은 이 전류에 저항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인다.
...
건강을 회복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정상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내가 치료를 받는 '목적'이라고 의사에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그 말을 참았다. (19쪽)
* 나이를 먹으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져서 시간에 백내장이 낀 것처럼 사는 것도 뿌옇고 죽는 것도 뿌옇다.
슬플 때는 웃음이 나오고 기쁠 때는 눈물이 나오는데, 웃음이나 눈물이나 물량이 너무 적어서 나오는 시늉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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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도가 바뀌면 키스의 맛이 달라지는 모양인데, 키스의 모든 각도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각도다. 이 동네 버스정류장에서 모든 키스는 첫 키스다. 주말이면 나는 버스정류장 앞 술집에 앉아서 이 귀대 키스의 대열을 관찰하는데, 이때 나의 정신은 뿌옇지 않다. 삶이 저토록 빛나므로, 나의 마음은 명석하다.
(40쪽)
*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저무는 저녁에 허균, 차천로, 김득신의 독서를 생각하는 일은 슬프다. 독서는 쉽고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더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살이는 어렵고, 책과 세상과의 관계를 세워 나가기는 더욱 어려운데, 책과 세상이 이어지지 않을 때 독서는 괴롭다. (157쪽)
* 대가야의 왕조는 신라 진흥왕 때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끝났다 (서기56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 전쟁의 총사령관이었고 열다섯 살 소년 화랑 사다함이 전투현장의 선봉장이었다.
...
화랑 사다함은 용모가 수려하고 뜻이 고결해서 많은 낭도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진흥왕이 상으로 내린 가야 포로 300명을 모두 풀어주었고 왕이 주는 땅도 사양했다고 <삼국사기>에 적혀 있다. 사다함은 피에 젖은 채 성불했던 모양이다. (192쪽)
* 디지털은 모든 정보와 자료를 기호로 바꿈으로써 문명의 개벽을 이루었지만, 삶과 언어의 바탕은 기호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례로 무너져 간 황 씨의 생업과 그가 남긴 작업도구들은 불멸의 추억으로 인류의 근육에 각인되어 있다. 시장 상인들은 새로 날아올 제비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과 그리움은 모두 아날로그의 사업이고, 디지털의 공간 속으로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279쪽)
* 꽃 핀 나무 아래서 온갖 냄새들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노년은 늙기가 힘들어서 허덕지덕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이 미세먼지 속에서 아기들이 태어나서 젗 토한 냄새를 풍겨 주기를 나는 기다린다.
이 마지막 한 문장을 쓰기 위하여 나는 너무 멀리 돌아왔다. (318쪽)
* 나는 말에서 태어난 말을 버리고 사람과 사물에게서 얻은 말을 따라가기에 힘썼다. 나는 나의 언어가 개념에서 인공 부화된 또 다른 개념들의 이어달리기에서 벗어나서 통속을 수행하기를 바랐다.
...
나는 공적 개방성을 갖춘 글 안에 많은 독자들을 맞아들이려는 소망을 갖지 못했다. 나는 나의 사적 내밀성의 순정으로 개별적 독자와 사귀고, 그 사귐으로 세상의 목줄들이 헐거워지기를 소망한다. 글을 써서 세상에 말을 걸 때 나의 독자는 당신 한 사람뿐이다. 나의 독자는 나의 2인칭(너)이다. (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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