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사람이랑 861

속수무책

고 엄살을 부리며 시작하니 한결 가볍다. 사실 난 아직 죽을만큼 힘들진 않으니까. 자존심 짱짱, 꼿꼿하던 어머니가 완전 아기가 되어버렸으니... 매일 어머니께 두 가지 선택권을 드린다. 밥 드시겠어요. 죽 드시겠어요. 곰국이요. 미역국이요. 전복죽이요. 콩나물죽이요. 여전히 묻는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거의 형식적인 물음이긴 했지만...) 참 슬프다. 인간이 이리도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 정신이 맑으면서 몸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속수무책이, 그 속수무책이 표현할 수 없이 참담하다. 그 참담함이 슬프고 슬프다.

난 죽었다

금요일 아침, 어머니가 거동이 없으시다. 아버님 얼굴이 하야져서 어젯밤에 겨우 부축해서 화장실을 다녀오셨다고 한다. 어머니가 어지럽다며 못 일어나시겠단다. 다리에 힘이 없다. 중심이 안 잡힌다. 다니던 병원에 부탁해서 간호사가 와서 링거를 맞혀드렸다. 우선 기운을 차려서 병원을 가려고... 토요일, 냄편과 함께 양쪽에서 부축해서 용하다는 이비인후과에 갔다. 신경과 내과, 외과에서 별 이상이 없다하고, 달팽이관 이상으로 어지럼증이 올 수도 있다고 하니까. 이곳에서는 검사 자체가 부정확하단다. 의사의 지시를 제대로 따를 수가 없으니. 일요일 집에서 쉬고, 어제, 오늘은 아버님과 함께 양쪽에서 부축해서 용하다는 한의원을 다녀왔다. 초진을 3개월 기다려야 한다는데, 몇 다리 걸쳐 겨우 예약을 하고 5시 40분에..

'문학은 나의 방부제'

에세이플러스 송년모임에 소설가 박범신을 초대했다. 강연 주제가 이었다. 작가로 향기롭게 살아남는 법. ㅋㅋ 멋진 말이다. 그러나 작가라는 직업이 '성질 더러운 년'과 37년동안 산 느낌이라면서 우찌... 향기로울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정상이 아닌, 나만의 정상을 향해 오르는 알파인스타일의 사람. 자본주의, 고정관념, 편견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사람. 언제나 뜨겁거나 차가워질 수 있는 사람. 끊임없이 독자에게 작업 걸고 있는 사람. 자유로움이 많은 삶이었다고 자부하는 사람. 그리하여 문학이 자신의 삶에 방부제가 되는 사람. 강의가 끝난 후 뭔가 희망적인 느낌이 온 건 다행이다. 향기를 풍길 수 있으려나. 언감생심 꿈도 꾸게 되네. Porcupine Tree - How Is Your ..

잘 노는 일

딸이 2주 동안 일본에 있는 제 집에 다녀온다고 엄만 휴가를 잘 즐기라 했다. 카나다에서 2년에 한번씩 오는 시누이가 친구라서, 함께 밀린 친구만나기에 바쁘다. 7,8년 못 만난 친구들까지... 딸이 친구들과 놀라고 양양에 있는 펜션까지 예약해 주고 갔으니 다음주에는 좀 더 열심히 놀아야 한다. 요즘 내내 하는 말이다. 중간중간 공식행사, 지난주엔 호세 카레라스 공연 보고, 좋아하는 베이스 이연성의 러시아음악 공연도 가고, 그 중간에 아들과 김장훈 콘서트에 가서 소리소리 지르기도 하고. 주말엔 결혼식, 숙제는 밀리고... 병나지 않은 게 감사할 지경이다. 어제는 후배의 멋진 논문을 읽으며 칭찬을 늘어지게 하면서... 속으론 좀 많이 반성했다. 내 게으름에 대하여, 내 한계에 대하여, 아, 이런 기분이겠구..

일, 일, 일

피할 수 없는 인사치레들로 정신이 없다. 딸이 아기를 데리고 왔다. 이 천사는 낮과 밤이 바뀌어서 밤잠을 설치게 한다. 이제 한달된 신생아가 지 분수를 모르고 똘망똘망 놀자고 한다. 백일 무렵까지는 먹고자고 먹고자고 해야 살도 오르고 무럭무럭 크는 건데 말이다. 아기 보러 친구, 친척들 오가고... 한달간 충성을 다 하리라 다짐했는데 자꾸 일이 생긴다. 어제는 아들 아이의 상견례를 했다. 딸아이 때 해 봤는데도 여전히 어렵고 어색한 자리다. 아이들 칭찬으로 핑퐁게임을 너댓번 주고받고, 이런 걸 립써비스라 하는지... 따끈한 정종이 오고가니 얼굴이 붉어지고 긴장이 풀어질 즈음 헤어졌다. 손목이 시리다. 다친 손가락도 아직 삐져있다. 내 말을 듣지 않는 내 몸이 먼저 할머니가 되었음을 인식시킨다. 몸 뿐인가..

장하다, 생명

밤새 촛불 밝히고 기다렸는데 10시가 다 되어서야 소식이 왔다. 진통이 길어 무통으로 정상분만했다고 한다. 친정엄마가 곁에 있어야 하는 시간에 그야말로 이역만리에서... 애만 타는 밤을 보냈다. 예정일 2주 당겨서 세상문을 열고 나온 새 생명, 이란 미국이름을 지었다고. 한국이름은 엄마가 지으라고.. 나는 착한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무조건, 무차별 사랑의 포탄을 쏟아부을 수 있을까. 할머니가 된다는 것은 한 생명을 온전히 감싸안을 수 있는 커다란 보자기를 펼치는 일이 아닌가. 흐믓한 미소만 지어야하는... 글쎄.. 태생적 덜렁끼에 속수무책의 환상은 우짜나... 어쨌건 지금은 감사, 또 감사다. Жанна Бичевская - Как по Божией гор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