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신념의 매력 / 신선숙

칠부능선 2024. 6. 8. 13:48


숙제를 잊고 푹 빠져서 읽었다.

작가는 평범하다고 말하지만 평범한 삶은 아니다. 전력투구하며 살아낸 시간이다. 그의 건강하고 활기찬 에너지, 주위에 대한 관찰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에서는 비실비실 실소가 지어진다. 그러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그의 큰 슬픔에 목울대가 뻐근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그대로 스며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너그러운 미소의 품이 넓은 인상이 만들어진 과정의 기록이다.

삶은 넘어서기다. 넘어선다는 것, 고통과 불행을 넘어서면서 상처와 한을 갖지 않고, 오히려 관용을 품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내가 한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 '점'을 보는 일이다. 미래에 대해 알게 되면 이리 마음이 커지는 건가. 갈수록 모르는 게 많다. 오래전 내가 갔던 가야산 '마음수련'을 만난 것도 반갑다.

경의와 박수를 보낸다. 글을 쓰며 더욱 자유롭고 행복하시길.

 

고통이란 것이 주어졌을 때만 삶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다. 고통을 견디다 보면 인생을 보는 눈이 생기고 사유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삶을 직면한다고나 할까. 글을 쓰면서 깊은 슬픔이 지나가는 자리에서 비로소 성숙해지고 따끈한 그리움이 잉태된다는 소중한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내내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말들을 꺼내어 글로 써봤다. 내 글에서는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는 자유가 펼쳐진다는 매력이 있다. 어떤 이는 나의 에너지가 크니 글로써 공감하게 하고 사람들 마음을 편안히 해주라고 했다. 감히 내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 <작가의 말> 중에서

* 그는 혼자 만들어 낸 신념교의 교주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한 사람뿐인 나 홀로 신도가 되어 일생을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에게만은 관대해선 안 된다는 또 하나의 지론이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인지라 아내에게도 관대하게 대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에게 다정히 대하면 자기 가족이 나를 싫어할 것이고 그러면 내가 힘들어지니 나를 위해서 그들 앞에선 친절하게 굴지 않겠다는 뚱딴지같은 다짐을 했다고 한다. 스물두 살의 어린 신부여서 뭐가 뭔지도 몰랐다고 말하면 너무 어리석은건가. 큰소리쳤던 그도 그때는 스물여섯밖에 안된 애송이였다.

애송이 같은 신랑이 스물두 살 철부지 색시에게 냉정하게 굴며 남편은 하늘이라고 무게를 잡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가히 웃기는 일이다. (77쪽)

* 바스러진 손가락을 보면서도 가해자에게 원망하지 않았다. 웃어주며 도리어 미안해 말라며 위로하는 나를 사람들은 무슨 관세음보살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의 운수가 그랬다고 생각하니 가해자가 오히려 나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수를 보지 않았다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내 얼굴이 그렇게 편안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더 잘살기를 염원하고 가족의 안녕을 빌며 새벽도 마다하지 않고 점 잘 본다는 곳으로 번호표를 타러 다녔던 젊은 날, 기복적인 욕심이 남달리 많았던 것일까. (114쪽)

* '나이스 파'라는 전설의 별명을 가진 나는 '신 무식'이라는 별명도 싫지는 않다. 별명대로 무식하게 쳐대면 파란 하늘을 향해 공이 멀리멀리 날아가는 모습에 가슴에 막힌 것들이 뻥 뚫리는 것 같다. (200쪽)

* 희성이가 캐나다로 떠나기 전 같이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영화 속의 공주가 죽는 장면이 있었다. 그녀는 뚜껑 열린 관 속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잠자는 미녀처럼 누워 있었다.

"나는 엄마 없으면 못 사니 엄마보다 먼저 죽고 싶어. 나도 죽으면 저렇게 예쁘게 장례를 치르면 좋겠다."

그때 난 그런 소리 하는 것 아니라고 심하게 야단쳤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 그 말이 씨가 되어 내 딸은 그렇게 나를 떠났다. (258쪽)

* 종로에 갔었다. 딱 한 가지만 질문하고 거금은 내는 곳이다. 그 한마디 질문에 내놓는 대답이 백발백중이라고 평판이 자자한 곳이다. ....

"뉴욕 맨해튼 49번지에서 딸이 갔네! 보살! 딸이 엄마 걱정이 많구먼."

" 엄마가 제일 걱정이야. 모임도 잘 다니시고 골프도 열심히 치며 즐겁게 살아야 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엄마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니까'라고 했잖아요.?"

마지막 전화로 희성이가 한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 뇐다.

" 모레 금요일에 나랑 골프 한번 치러 갑시다. 딸이 엄마를 꼭 한번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니 우리 비서들이랑 같이 가요!" 그러고는 내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명을 내렸다.

" 모레는 쉰다고 팻말을 붙여라."

그 많은 손님을 포기하면서까지 나를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제일 비싼 골프장으로 간다기에 속으로 여러 사람의 비용이 만만찮을 건데 어찌 댈까 걱정했으나 모든 비용을 그 선생이 다 냈다. 깨끗하고 지혜로운 영가로서 죽어서도 엄마를 위해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골프를 한번 같이 쳐 달라고 부탁을 하더란다. 영가가 기특하고 갸륵한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일을 누가 믿겠는가.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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