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미오기傳 / 김미옥

칠부능선 2024. 6. 3. 22:52

김미옥의 두 번째 책이다. 이번 책은 단숨에 읽었다. 서사는 힘이 세다.

『미오기傳』은 맛깔난 수필이다. 그가 살아낸 시간의 기록이다.

통탄해야할 기억에 큰 스프링을 달았다. 명랑하게 통통 튄다. 수필가들이 배워야할 덕목이다.

김미옥, 그는 실력과 배려심를 갖춘 드물게 멋진 여자 사람이다.

그는 귀신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는 달관자, 능력자다.

그의 삶이 경이롭다. 

프롤로그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때마다 나는 과거를 불러 화해했다.

쓰고 맵고 아린 시간에 열을 가하자 순한 맛이 되었다.

나는 술래잡기하듯 아픈 기억을 찾아내 친구로 만들었다.

내 과거를 푹 고아 우려낸 글, '곰국'은 이렇게 나왔다.

.....

책 제목은 『미오기傳』이지만 시간순으로 쓴 글은 아니다.

말하자면 통증지수가 높은 기억의 통각점들을 골라 쓴 점묘화다.

서글픈 기억이 다시는 내 인생을 흔들지 않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쓰다 보니 웃게 되었고 웃다 보니 유쾌해졌다.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운은 어쩔 수 없어도 성격은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나쁜 기억은 끝끝내 살아남는 무서운 생존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마음을 열면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이 온다.

아픈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 2024년 4월 김미옥

* 12살 여자아이의 공장은 밤 11시도 불사하는 가혹한 곳이었다.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도 없이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는데 사는 게 억울했다. 그때 내가 처마밑에서 억울함으로 떠올렸던 생각이 나중에 보니 엥겔스의 대정부 질문에 있던 내용들이었다.

 '노동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은 몇 세부터인가!'

 나를 양녀로 들이려 했던 계획이 실패하자 선생님은 공장에 찾아오시거나 공휴일에 나를 불러 학습 계획을 세우고 검정고시 공부를 시켰다. 엄마에겐 비밀이었다. 희망을 걸었던 아들 셋이 뛰어나지 못하니 엄마의 신경은 극도로 피폐해져 딸년이 책을 본다는 사실만으로 허파를 뒤집곤 했다. (24쪽)

* 새벽에 전화를 받았다. 말다툼을 한 엄마가 노란 빨랫줄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엄마는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종종 노란 빨랫줄을 들었다. 어린 B군이 맨발로 뛰어나가 현관에서 할머니를 붙들고 통곡을 했다. 조손이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할머니, 죽지마! 엄마가 돈 줄 거야!"

 형제들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엄마는 나의 거절에 충격을 받았다. 그날 손자 B군이 집에 없었다. 엄마는 돌돌 만 노란 빨랫줄을 들고 조용히 나갔다. 붙들지 않았다.

노란 빨랫줄이 지겨웠다. (67쪽)

* 나중에 알았지만 나는 사흘을 앓았다. 사흘째 되던 날 문이 열리더니 밥상이 들어왔다. 매일 그 나쁜 남자에게 얻어맞고 돈 뜯기던 옆방 여자였다. 김치찌개 냄비에 밥 한 공기였지만 내 평생 그토록 맛있는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밥을 해 먹은 기미는 없고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멍하니 밥상 앞에 앉아 있으니 문을 반쯤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던 여자가 혼자 먹으라며 나갔다. 배려였다.

나는 맹렬하게 수저질을 했는데 슬프지도 않았건만 눈물이 혼자서 흘러내렸다., 여자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

....

그때 왜 나는 왜 두 살이나 많은 여자에게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던 걸까? 직업이 그래서? 생각 없이 사는 무뇌충 같아서?

나는 내가 살아온 것이 나 혼자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술집 여자의 밥 한 공기 같은 도움을 알게 모르게 받고 살았다. 내가 사람의 직업이나 계층을 보지 않고 인간성을 보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128쪽)

* 젓가락과 숟가락이 대혼란을 일으키며 끝이 났다. 인사는 숟가락으로 퍽큐를 날렸다. 입상은 생각도 안 했는데 인기상과 최우수상을 먹었다. 대상은 품위를 고려했는지 넬라 환파지아 팀에게 갔다. 우리 셋은 넬라 환타지아 팀에게 다시 한 번 숟가락으로 퍽큐를 날렸다.

저녁에 상금 100만 원과 인기상의 상품권까지 셋이서 공평하게 나눴다. 다음 날 회의 시간에 개자식이 얼마 받았냐고 물었는데 우리끼리 먹고 떨어졌다고 했다. 개평을 바랜 눈치였던지 입맛을 쩝 다시고 말았다.

...

바빠서 분기별로 한 번씩 만나는 우리 숟가락 팀은 소주를 반주로 저녁을 먹고 나면 노래방에 가서 숟가락을 두드린다. 물론 노래방 기계는 화면만 보이게 하고 트로트를 불러젖히는 것이다. 여자라서, 이혼녀라서, 늙은 독신녀라서 만만하게 보고 덤비는 세상에 숟가락으로 퍽큐를 날리는 것이다. 다 덤벼! (182쪽)

* 세상을 사는 것은 연필처럼 제 몸을 깎아내는 일이었다. 나는 조금씩 줄어드는 몸피를 보면서 나를 스쳐간 시간을 절감했다. 이제 볼펜 몸통에 의지하던 몽당연필처럼 내 삶도 소멸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오늘 다시 연필로 편지를 쓰고 싶다. 연필 세 자루를 정성 들여 깎아서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나의 연필로 쓰인 문자가 구부리고 펼치고 넘어지며 마침내 날아올라 결승結繩이 되어 그대를 묶게 되기를. 다음 생을 넘어 다다음 생까지 나의 문자가 당신을 기억하기를.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 햇빛 유리가 어떻게 내 눈을 찔렀는지 당신이 나의 하루를 알아주기를.

어떤 것도 너무 힘을 주어서는 안 된다. 편지는 점점 옅어지고 흐려져 힘을 준 자국만 남을 것이다. 사라짐은 아름다운 일이다.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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