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그리움 쪽에서 겨울이 오면 / 배귀선

칠부능선 2024. 1. 7. 18:19

배귀선 선생은 여자인줄 알았는데 남자였다.

그제 <The수필> 출판기념에서 만나고, 첫 수필집을 찾아 읽었다.

호쾌한 모습을 보였는데.. 글에서 보니 선생는 술이 약하다. 섬세하고 속정도 깊은 듯.

안타까운 서사를 거쳐 지금은 안정권에 든 듯하다. 상처없는 삶은 없고, 상처가 글쓰는데 재산이라는 건 확실하다. '봉인된 서러움'을 털어 놓아, 스스로 치유되고 위로받는다. 장하게 지나온 시간에 박수보낸다.

표제작 <그리움 쪽에서 겨울이 오면>을 읽으며 난 실소를 했다. 지지난 겨울인가 절친들과 둔내에서 1박을 하고 다음씨가 기막히게 맛있는 곰치국을 먹어야 한다면서 속초까기 안내했다. 한 그릇에 3만원인데 머릿수대로 시켜야 하고, 그것도 현금결제만 해야한다는 식당이다. 깊은 맛도 모르고, 폭력에 가까운 모양새와 양에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이 글을 먼저 읽었으면 좀 더 성의있게 곰치국 앞에 앉았을 텐데.

배귀선 선생은 그리움과 외로움을 동력 삼아 청년의 시간을 이어가리라 기대한다.

* 고추밭에 다녀오는 동안 얼마나 숙성되었을까.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원고를 들여다본다. 초고 때 드러나지 않은 허물들이 비어져 나온다. 수식 관계가 마음 따로 몸 따로인 연인처럼 저만큼 떨어져 있다. 중언부언 복문은 연애의 속도감을 줄이고 소유격 조사는 단어와 단어가 지니는 동등성의 의미를 절감시키고 있다. 고친다. 추상적 어휘의 반복은 식상하고 관념적이며 일상에 회자하는 남의 말들이 진부하게 늘어져 있다. 또 고친다. 그러나 이러한 수필 형식은 고집한다. 획일화되어 가는 나를 경계하고 싶기 때문이다.

(38쪽)

몇 시간 만에 원고청탁을 수락하고 송고하면서도 이런 과정을 거친다.

*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막다른 길. 그 순간 왜 노을은 미치도록 아름다웠는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아픔 또한 살아야 할 이유라는 생각이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죽을 수 없어 살아야 하는 당위는 차라리 희열이었다. (74쪽)

*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거저 왔으니 거저 주어야 하는데, 온몸을 암이란 놈이 휘감아 눈밖에 줄 게 없어 미안하다며 멋쩍은 미소를 지으시던 어머니… . 피골이 상접한 그 미소는 정녕 이곳에 천국을 이루신 사랑의 미소였습니다. 작은 예수였습니다. 당신의 눈은 온전한 사랑의 눈으로 제 가슴에 등불이 될 것입니다. (169쪽)

* 수필은 흔히 자아 발견의 장르이면서 성찰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정작 어떻게 나를 찾고 성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교사의 폭력을 뺨으로 받아낸 유년의 기억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한때는 교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가까이하기가 어려운 족속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내 아들의 바른 교사상을 언급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두려운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내 안에 가득했던 원망과 복수에 대한 무화의 성찰 같은 것이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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