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고독한 기쁨 / 배혜경

칠부능선 2023. 12. 22. 14:52

촘촘했던 연말 모임이 헐렁해졌다. 바로 숙제에 돌입했다. 연말에 밀려온 책들을 잡았다.

'고독한 기쁨'은 내게 '즐거운 숙제'가 되었다.

첫 책 『앵두를 찾아라』부터 눈길을 끌며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중상을 입은 몸으로, 책과 영화에 몰입하는 모습은 경건한 그림이다.

서툰 못질 없이, 제 몸으로 연결하는 장인처럼 책과 영화, 몸이 변화를 자연스레 엮었다. 내가 못 읽고 못 본 영화가 훨씬 많지만, 내가 읽은 책과 영화는 반갑게 만나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세잔과 에밀졸라 이야기는 그림 그리는 친구와 주변 예술가들을 생각하며, 더 다가왔다. 내가 두 번 다녀온 삼척의 부남해변에서 저리 풍성한 감성을 쏟아놓다니 ... 내가 놓친 풍광을 새로이 만나며 감탄한다. 속깊은 문장과 주문할 책과 보고 싶은 영화로 포스트잇이 자주 붙었다.

크게 박수보내며 많이 배운다.

* '고독' 에 孤獨,苦讀, 두 가지 의미를 담았다. 후자에 힘을 준다. 책상에 스탠드 불빛을 바투 비추고 다친 다리를 올리고 앉아 읽는 일은 육체적으로 힘이 들었다. 글자 그대로 힘써 읽는 동안 작고 익숙한 기쁨이 무시로 찾아왔다.

- 여는 말 중에서

* 내가 마시는 홍차는 어제 받은 책,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선집 『차 한 잔』이랑 같이 온 티백이다. 병원으로 바로 주문했더니 금속 소재 황동색 앤티크 티스푼이랑 출판사 선물로 냉큼 당도했다. 크게 쓸모없는 물건이 가끔은 기분을 좋게 한다.

....

버지니아 울프가 유일하게 질투했다는 캐서린 맨스필드는 1888년 뉴질랜드 태생이다. 런던에서 작가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간 맨스필드는 1916년 블룸즈버리 그룹과 인연으로 버지니아 울프와 상호 존경과 라이벌 의식이 뒤섞인 복잡한 우정을 키워 나갔다고 한다. (71쪽)

* 에밀 졸라는 미완성 작품 앞에서 과도한 욕심을 가진 창작자를 죽음으로 몰아 파멸시킴으로써 자연의 우등함과 인간의 미약함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불구의 운명을 타고난 작품 앞에서 한 번도 완벽할 수 없는 예술가의 숙명적 한계를 고뇌하면서도 받아들이고 예술가로서 부단히 정진하는 것만이 예술가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81족)

* <완벽한 가족Blackbird> 로저 미첼, 2019

.... 스위스 존엄사의 맹점을 극복할 수 있게 제안하는 셈인데 이처럼 완벽할 수가. 중국에서는 완벽하다는 뜻으로 '완미'나 '완선'을 쓴다. 완벽하다는 말속에는 아름답고 선하다는 뜻이 담겨 있고, 양보와 이해가 담겨 있다.

영화는 행복한 이별을 달성하는 과정을 통해 가족 각자가 이해받지 못한 생의 이면과 마음의 암실을 드러낸다. 보이는 것으로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진리다. (135쪽)

*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특이한 방식으로한 획을 그은 <쇼아>는 정말 특별하다. '홀로코스트'는 신에게 바쳐진 재물이라는 뜻으로 서구권에서 쓴 단어다. 유대인들이 쓴, 대재앙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쇼아'로 이미 부른다.

....

각본집 『쇼아』의 서문을 시몬 드 보부아르가 썼다. 망설일 것도 없이 총 9시간 26분의 DVD 4개와 함께 구입했다. '공포의 기억'이라는제목으로 시작한 서문은 " <쇼아>에 대해 이야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로 조심스럽게 입을 땐다.

...

고통이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도록 영화와 문학이 여러 방식으로 쇼아의 기억을 재생한다. 평범한 여성과 아이를 중심으로 쇼아의 깊은 상흔을 이야기하는 영화를 보았다. (213쪽)

* 책 리뷰를 골조로 다섯 번째 집을 구상하며 제목을 서른 개 넘게 생각했다. 마지막에 떠올린 이름을 문패로 달고, 몸과 영화가 이음매가 되는데 만듦새는 일기 형식을 따랐다. 일종의 독서일기가 되었다. 여전히 비가 새고 바람이 들어온다. 꾸준히 실패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닫는 말' 중에서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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