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숙 작가의 '몸짓'은 어떤 춤보다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자신을 재료 삼아, 골골 진국을 뽑아냈다. 조미료 없이 낸 깊은 맛에 홀려 거듭 찾게 되는 맛이다.
마냥 담백하지 않다. 재료 자체가 특별하다. 눈물씨앗으로 진주를 빚었다.
한 줄 한 줄, 아니 한 자 한 자 땀으로 써내려간 글이다. 피라고 해야할까. 신산한 기록이 은유의 강을 넘실댄다. 곧 포용의 바다에 이를 것같다.
ㄱ선생이 ㄹ작가에게 했다던 말이 떠오른다. "너의 불우가 부럽다" 작가에게 불우는 재산이다.
<미싱과 타자기>, <몸짓>, <끝내주는 남자>, < 진달래> ... 낯익은 작품에도 거듭 감탄한다.
저자가 '두 손 모아' 건네 준 책을 읽으며 나도 두 손을 모으고 깊이 고개숙인다.
* 두 귀에는 저 멀리 아득한 은하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가득했다. 두 발로 허공을 딛고 손끝으로 달빛을 감치며 너울거렸다. 순간순간 황홀하고 저릿한 느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것도 목적하지 않은 그 행위가 더없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눈을 감고 발을 들어 올리다가 수채 옆에 놓여 있는 양은 세숫대야를 냅다 걷어차기 전까지는. (60쪽)
* 작은 악어는 나의 슬픔을 먹고 자랐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 들리는 수업 종소리에서, 오랜 병고 끝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언 땅에 누이고 흙을 뿌리는 내 손등에 떨어지는 싸락눈에서, 먼 이국땅으로 떠나야만 했던 동생의 해진 소멧부리를 바라보던 순간 뽀얗게 흐려진 세상에서 슬픔은 봇물이 되어 내 늪지로 몰려들었다. 악어는 점점 몸집을 불렸다. (99쪽)
* 작은 악어는 나의 슬픔을 먹고 자랐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 들리는 수업 종소리에서, 오랜 병고 끝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언 땅에 누이고 흙을 뿌리는 내 손등에 떨어지는 싸락눈에서, 먼 이국땅으로 떠나야만 했던 동생의 해진 소멧부리를 바라보던 순간 뽀얗게 흐려진 세상에서 슬픔은 봇물이 되어 내 늪지로 몰려들었다. 악어는 점점 몸집을 불렸다. (99쪽)
* 또다시 소리를 앞세우고 지하철이 도착했다. 도심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 금발 백인 커플과 동양인인 우리 남매. 함부르크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도시라고 한다. 다양한 사람들만큼 다양한 소리가 존재한다. 이렇게 이들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서로 다른 소리를 편견 없이 들어주는 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용히 앉아 있는 그들의 귀로 자꾸만 시선이 가는 사이 지하철은 귀 안 같은 긴 터널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113쪽)
* 더 이상 일상이 일상일 수 없었던 어느 날부터 국밥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손가락과 손등에 덴 상처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 곁에는 무쇠로 된 가마솥이 있었다.
팔을 힘껏 뻗어야 바닥에 손이 닿는 품이 넓은 가마솥이었다. 반쯤 찬물을 넣고 불을 붙이면 가마솥 안쪽으로 마치 땀방울 같은 물방울이 맺혔다. 네 수고를 기꺼이 같이 감당하겠다는 무언의 약속 같았다.
... 가마솥과 함께 십 년 가까이 땀을 흘리자 마침내 일상이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나도 조금은 가마솥을 닮아 있었다. 세상의 불길을 인내하며 일상을 지켜낼 용기가 생겼다. (176쪽)
* '사물 하나하나는 더 좋은 어떤 것으로 변화해야 하고, 새로운 운명의 길을 가야 한다.'
《연금술사》를 쓴 코엘료의 말이다. 나는 어설픈 언어술사의 길을 가고 있다. 나의 단어와 문장에는 눈물이 번진다. 이 눈물을 진주로 만들고 싶다. 내 글에서 파도치는 슬픔이 문장 사이를 드나들며 상처를 위로하고, 아물게 하고, 마침내 영롱한 진주를 품게 되면 내 술법은 완성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조금씩 깨우치고 있다. 술법의 완성은 금이 아니라, 납에서 금으로의 여정에 있음을. 그저 한 발을 떼고, 진심 어린 글 한 편을 쓰는 일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혼자서 되뇌어 본다.
(181쪽) <언어술사> 중에서
*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단어와 문장을 쪼아먹는다. 단어는 풋보리처럼 탁 터지는 것을 좋아하고, 문장은 지렁이처럼 살아 꿈틀거리는 걸 즐긴다. 가끔 푸성귀도 먹는데, 그럴 때면 속이 시원해진다. 마치 식물의 상상력을 흡수한 것 같다. 푸성귀들은 내가 낳을 알의 이미지를 만들며 산란을 촉진한다. 단어와 문장은 책 속에 가득하고, 푸성귀는 산책길에 널려 있다. (262쪽) - <암탉론> 중에서
'놀자, 책이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양인의 서양건축사 / 이민정 (0) | 2024.01.25 |
---|---|
상처로 숨 쉬는 법 / 김진영 (0) | 2024.01.20 |
당신은 오월을 닮았군요 / 박은실 (0) | 2024.01.09 |
그리움 쪽에서 겨울이 오면 / 배귀선 (0) | 2024.01.07 |
성남문예비평지 <창> 15호 (0) | 2023.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