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한 번의 봄을 넘긴 작가 박은실은
"당신은 오월을 닮았군요" 언젠가 이런 말을 꼭 들어보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한다.
첫 수필집이 야무지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큰할머니가 등장하는 가족사도 시선을 끌어당긴다.
큰 상처 없이 소소한 일상이 작품으로 등장할 때 필요한 것들을 잘 장착했다. 공부하며 쓴 수필, 독자에게 다가가는 궁리를 하면서 쓴 수필이다. 단숨에 읽히는 장치, 위트와 유머도 있다.
오월처럼 연둣빛 해사한 작가의 얼굴이 바로 떠오른다.
믿음직스럽다. 박수보낸다.
* 자신이 값비싼 생선인 줄 아는 도마 위 여자는 오만상을 쓰며 나처럼 저분의 거울이 되어가고 있었다. 돌덩이 대접을 받는 여인에게 강한 동류의식을 느꼈다. 나는 입꼬리가 귀까지 말려 올라가도록 고소한 웃음을 지었다. 초보 세신사의 우악스러운 손길을 통해 마음속 돌을 갈며서 내가 아주 조금 도를 닦았다는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저분의 값비싼 생선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으며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미끄러지듯 목욕탕을 빠져나왔다. (79쪽)
옆자리 노련한 세신사의 손님 다루는 솜씨를 보며 초보 세신사를 견디며 "옛사람들은 거울보다 먼저 마음을 비춰보는 돌을 발명하였습니다" 를 떠올린다. 내 몸을 돌인양 갈고 갈며 연마중이라고...
* 인생이란 남의 일로만 여겨졌던 일들이 내 일이 되는 과정이라더라. 갑상샘이 떼어지고 림프샘이 도려내어지고 성대가 그의 목에서 잘려나갔다. 그렇게 식도를 제외한 목 주변 조직이 난도질당하는 수술을 두 차례나 받고 방사선치료를 받고 다른 환자들과 똑같은 순서를 밟은 뒤 그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 (143쪽)
목소리를 잃고 생명을 연장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 남자와 첼로'에 비유하며 담담히 적어낸다.
* 국수가 곧게 가르마 타 내려가 머리채 동여맨 고전 미인이라면 라면은 쪽 찐 머리 싹둑 자르고 뽀글뽀글 파마한 양장 미인이라 하겠다. 국수가 은장도로 자결한 해쓱한 구절초라면 라면은 저마다 다른 사연 품어 안고 하롱하롱 떨어지는 봄날 벚꽃이라 하겠다. 국수가 곧게 쭉 뻗은 고속도로라면 라면은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이라 하겠다.
라면이 꼬불꼬불한 꺄닭을 아는가? 누구에게라도 삶이란 구절양장! "라면은 외팔이 조폭에게도 귀남이 종손에게도 나름의 사연과 추억을 함축해 놓은 저장고다." 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따금 삶이 지루해 샛길로 빠져보고 싶을 때, 나는 라면을 뜨겁게 끓여 먹는다. (220쪽)
영화 <내부자들> 속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나도 본 영화인데 도통 생각이 안 난다. 영화를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해서 받은 계란을 넣은 라면, 엄마에게 종손을 제치고 처음 제대로 받은 대접이라고 한다. 맛깔난 글 탓에 급 라면이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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