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멜랑콜리아Ⅰ-Ⅱ / 욘 포세

칠부능선 2023. 10. 21. 23:39

욘 포세, 1959년생 노르웨이 작가,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 ‘헨리크 입센의 재림’, ‘21세기의 사뮈엘 베케트’라는 찬사와 함께, 욘 포세는 입센 문학상, 아스케하우그 문학상, 스웨덴‧노르웨이 문학상, 윌렌달 문학상, 헤다 문학상, 노르웨이 문화 위원회상 그리고 최고의 희곡 작가에게 수여되는 네스트로이상 등을 연이어 수상한다. 2003년 프랑스 국가 공로 기사장을 받고,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선정한 ‘동시대 천재 100인’에 지명된다.

2014년 유럽 문학상을 수상하고,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집필에 매진한 끝에 대작 『7부(Septologien)』을 완성해 낸다. 2022년, 이 작품으로 부커상 국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된다.

욘 포세는 지금까지 소설과 희곡, 시와 에세이, 아동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영역에서 활약하며 약 7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전 세계 50여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

욘 포세는 모든 장르를 시도하고 활약하고, 인정받은 작가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목소리를 부여한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을 인정받으며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 아닌가, 하던 내 막연한 생각은 이 책을 읽고 다른 것을 말한다는 걸 알았다.

멜랑콜리아Ⅰ-Ⅱ실존인물인 노르웨이 풍경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를 추모하는 작품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은 -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병원에 있는 화가의 목소리와 치매 걸린 화가 누나의 목소리다. 지루한 책들이 궤도에 오르는, 100쪽을 분기점으로 삼았으나 그 이전에 익숙해진다. 후원자에게 받은 라스의 단벌 고급양복 '보라색 코듀로이 재킷'는 멜랑콜리아Ⅱ》 까지 나온다.

멜랑콜리아Ⅰ》은 화가 라스 헤르테그비그가 우울증과 정신착란으로 정신병원에서 지내는 이야기이며, 《멜랑콜리아Ⅱ》는 치매에 걸린 누이 올리네가 죽은 동생과 가족들을 떠올린다.

정신착란과 치매의 공통점이 반복 회상, 반복 회상하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인지...

읽는 내내 안타깝고 감정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표지에 있는 작품이 멜랑콜리아Ⅰ-Ⅱ 분위기를 대변한다.

 

라스 헤르테르비그 <보르그외위섬> (1867)

 

멜랑콜리아Ⅰ

* 뒤셀도르프, 1853년 늦가을 오후: 나는 아주 멋진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다. 나는 한스 구데를 만나기가 싫다. 나는 한스 구테가 내 그림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말을 듣기 싫다. 나는 오직 침대에 누워 있고 싶을 뿐이다. (11쪽) 시작

* 나는 내 곁에 서서 내 어깨에 한 손을 얹은 채 나를 내려다보는 보둠을 바라보았다. 코듀로이, 보라색 코듀로이! 고급 코듀로이 양복, 보라색 코듀로이 재킷, 구렁텅이 밖에 서 있는 사람은 타스타였던가! 그렇다. 거기에는 타스타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검은 옷은 어디로 갔을까? 그의 검은 옷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 혹시 내 바지 주머니 속에 있는 건 아닐까?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확인해 볼까? 코듀로이, 보라색! 보라색 코듀로이 바지! 그 바지는 보라색 코듀로이 바지였다! (103쪽)

* 맥주가 왔어요, 라스. 웨이트리스가 말했다.

햇살이 눈부셨다. 빛이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외면 빛과 내면의 빛을 말하며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면의 빛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웨이트리스를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여기 거스름돈. 그녀가 말했다. (119쪽)

* 원하는 게 뭔가요?

빙켈만 부인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딸, 헬레네, 헬레네 빙켈만과 함께 이곳을 떠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특별한 것이라도 있나요? 빙켈만 부인이 말했다.

나는 빙켈만 부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푸른색이었다. 그녀의 눈은 헬레네의 눈과 거의 똑같았다. ...

... 헬레네는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방금 이 자가 한 말을 들었나요? 헬레네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세상에!

빙켈만씨가 소리 내서 웃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으며 웃는 모습을 보았다.

...

이보세요. 그 아이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에요!

빙켈만 부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

빙켈만 씨는 경찰을 데려왔고 나는 이 집에서 쫒겨날 것이다. (248쪽)

* 가우스타 정신 병원. 1856년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갈매기들이 울부짖었다. 갈매기들은 계속 울부짖을 것이다. 갈매기가 울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다. 나는 잠을 설친 다음 날 아침엔 갈매기 소리 듣는 걸 좋아한다. 나는 갈매기들이 울기를 바랐다. (250쪽)

* 나는 매우 자주 두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는다. 내가 미쳐 버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나는 미쳐 버렸고 지금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더욱 자주 두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는다.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없기 때문에 두 다리 사이에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집어넣는다. 나는 이미 수도 없이 두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으며, 지금도 계속 그 일을 계속한다. 나는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두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는다. 이제 두 다리 사이의 그것이 훌쩍 켜져 배를 덮을 정도로 자랐다. (256쪽)

*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평생 화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산드베르그 박사는 내게 그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이건 모두 여자들 때문이다. 이 세상 여자들은 모두 창녀다. 이건 그들 때문이다. 이것 헬레네 때문이다. 내가 두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자위행위를 한 건 바로 그녀 때문이다. (267쪽)

* 나는 눈을 치우기 싫었다. 나는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 나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미친 사람들과 함께 서서 눈을 치우기 싫다. 눈은 멍청한 정신병자들이 치우면 된다. 한스 구데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에겐 눈 치우는 일이 딱 어울린다. (299쪽)

 

* 1991년 늦가을 저녁, 오사네: 비드메가 어둠 속의 비바람을 헤치며 걷고 있다. 그는 삼십 대 중반의 작가. 낡은 코트를 걸치고 그가 길을 걷고 있다. 그는 검은색 우산을 들고 회색 코트를 입고 있기에 어둠 속에서 내리는 빗속에서 자신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비드메는 자신의 삶을 바칠 만큼 중요한 뭔가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336쪽)

* 그는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가 태어난 보르그외위섬을 보기 위해 튀스베르에 갔다. 그는 튀스베르 해안에 서서 저 멀리 보르그외위섬을 바라보았다. 비드메에겐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그는 한적한 부둣가에 서서, 먼 친척인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가 태어나 유년기의 몇 년을 보낸 커다란 섬 보르그외위를 바라보았다.

....

혹시 라스 헤르테르비그를 아십니까?

아, 라스 헤르테르비그! 네, 잘 압니다. 미친 사람이었죠.

네.

비스메와 남자는 가만히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343쪽)

* 그는 다른 사제에게도 전화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저 자신의 작업실에 앉아 매일 글을 쓰리라고 다짐했다. 그는 글을 쓰기 위해 신의 자비를 구했다. 그에겐 신의 자비가 필요했다. 그는 글을 써야 한다. 작가 비드메는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글을 쓰기 위해선 신의 자비가 필요하다고. (372쪽)

멜랑콜리아 Ⅱ

* 올리네는 그 작은 집에서 그 많은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집이 복잡하긴 했지만 어떤 면에서 보자면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에겐 그 집이 크고 좋기만 했다. 게다가 그녀의 훌륭한 남동생 중 한 명은 유명한 화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지만 어느 순간 그가 그리는 그림은 낙서처럼 변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가 그린 그림을 작은집 문에 걸어 놓았다. 낙서처럼 보이는 그림 속에서는 말을 탄 기사도 볼 수 있었다. 담뱃갑 포장지의 뒷면에 그린 그림. 그다지 눈여겨볼 만한 그림이라곤 할 수 없었다. (385쪽)

* 소문에 의하면 라스도 마지막 순간에는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그도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미리암이던가? 에릴네던가? 아무튼 사납기 짝이 없는 여인의 집에서 다른 저소득자들과 함께 살았고, 침대에 누워 속옷에 용변을 보았다. (396쪽)

*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 있었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검푸른 바다에 하얀 파도가 넘실거렸다. 나는 라스가 하늘 같다고, 바다 같다고 생각했다. 항상 변하는 사람, 밝음에서 어둠으로, 흰색에서 칠흑 같은 검은 색으로, 라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바다와 똑같은 사람이고, 반면 나는 돌멩이와 습지 같은 사람이다. 누런 갈색, 그다지 울퉁불퉁하지도 않고 그다지 매끄럽지도 않은 사람, 가끔 꽃을 피우기도 하는 사람, 나는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411쪽)

* 라스와 나는 조심스레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고 견진 성사를 통한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아무도 아버지에게 그것을 알리지 않았다.

올바로 살아야 해.

이런 식의 삶은 끝을 내야 해.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라스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461쪽)

* 올리네는 자신의 숨결이 차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갑자기 너무나 피곤해졌다. 온몸이 축 늘어짐과 동시에 너무나 평온해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생선 눈알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생선 눈알과 라스의 그림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평온함에 몸을 맡기며 벽에 몸을 기댔다. 벽에 머리를 댄 채 앉아 있던 올리네는 그제야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생선 눈알과 평온한 빛뿐이었다. (5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