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귀한 책을 세 권이나 받았다.
책이 책을 확실하게 부르는, 공부거리 많은 책이다.
초대수필 <정의와 공정, 그리고 능력주의> 엄정식 선생님의 언명부터 허리를 곧추세우게 한다.
이번 책의 공통주제는 '정의' 다. 책과 관한 작품, 자유주제. 13인의 역량있는 수필가들 작품 세 편씩 담겨 알차다.
* 플라톤은 "결국 정의를 말하는 것은 어려우니 우리는 정의의 사례와 불의의 사례를 모아서 정의를 추론할 수밖에 없겠군. 그렇게 해서라도 정의의 상을 받아야 할 테니"라고 했네.
... 나는 플라톤에게 시라쿠사에는 얼마나 계실 것인지를 물었다. 플라톤은 "날짜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노예로 팔리지만 않기를 바라고 있네"라고 했고 나는 플라톤 선생의 무사귀환을 기원했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폴리스는 시라쿠사가 아니라 아테네이니 말일세.
- 김은중 〈학당 서고에서 발견된 작자 불명의 문서〉 (35쪽)
* 이 말을 끝내자 100살이 된 노학자 파우스트는 쓰러지고, 천사들이 파우스트의 불멸의 영혼을 안고 나타나 이렇게 노래한다.
"영靈의 세계에서 거룩한 한 사람이 악의 손에서 구원되었도다. 언제나 노력하며 애쓰는 자를 우리는 구할 수가 있다."
그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민속본이나 인형극에서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저 여자는 심판을 받았다"는 마지막 대사로 혹은 "파우스트는 영원히 저주받았다"는 대사로 막이 내리는데 괴테는 1808년판 《파우스트》 에서는 "구원받았다"는 천상의 소리를 가필하여 넣었다.
그것은 어릴 적 가슴에 이입된 파우스트 영혼과 함께 성장한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 맹난자 〈괴테의 시선 〉 (66쪽)
* 세상에는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성이 존재한다지만 나는 또 하나의 성性으로 모성母性을 생각한다. 이 염색체는 자신에게 속한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손에게 송두리째 내주는 것을 유전자의 본질로 한다. 나의 어머니가 그랬고, 외할머니가 그랬고, 외할머니의 어머니가 그랬다. 살아오는 동안에 만난 다른 어미들의 삶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얼추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 박금아 〈나팔꽃의 장례식 〉 (96쪽)
* 로빈슨 크루소는 그들과 함께 떠나지 않고 섬에 그냥 남기로 결심한다. 인종을 차별하고, 타자와 내가 한몸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 육지의 삶에는 죽음이 입을 벌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란차 섬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는 영원한 현재가 펼쳐지고 있다. 그 섬에서는 태양이 떠오르는 매일 아침이 최초의 시작이고, 세계사의 절대적인 시작이기 때문이다.
- 송마나 〈미셀 투르니에와 로빈슨 크루소 〉 / 루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고 (177쪽)
* 문학은 정답을 보여주는 답안지가 아니라 질문과 예시 정도가 적혀있는 꽤 고난도의 문제지일 뿐이라고 신유진이 말했다. 굳이 묻지 않고 살아도 그만일 뿐이지만 아니 에르노는 날것의 사실을 노출하며 우리에게 말을 건다. 그녀의 경험은 또 다른 경험을 불러내며, 삶은 개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누구의 삶이라도 될 수있음을 알려주며 위로를 전한다.
- 이상수 〈자신의 상처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걸다 〉 - '아니 에르노'를 읽고 (207쪽)
*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서식하는 패러독스 개구리는 성체가 되면 올챙이보다 6배 작아진다. 물에서 살 때는 덩치를 키워 먹이사슬 상위권에 존재하다가 육지로 나오면서 피부와 뼈, 몸이 축소되어 작게 진화한 것이다. 다른 동물들처럼 몸피가 더 커졌더라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작은 몸으로 숨거나 도망가기가 더 쉽기에 선택한 생존 전략이 탁월해 보인다. - 이성수 〈사족〉 (210쪽)
* 아이러니하게도 베케트가 언어 선택을 번복하곤 했던 것도 '결핍' 때문이다. 그는 모국어인 영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글을 쓰다가 프랑스어가 익숙해지자 다시 낯설어진 영어를 선택한다. 평론가들은 그의 이런 번복을 '원시적인 언어'로 역행하라 한 지암바티스타 비코의 영향으로 보기도 하는데, 1929년에 쓴 그의 첫 비평문이 〈단테... 부르노, 비코.. 조이스〉인 점으로 보면 그런 추측도 가능해 보인다. 익숙한 언어가 주는 상투성에서 벗어나 결핍된 언어, 왜곡되거나 불완전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표현의 순수함을 지켜보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고 할까.
- 이혜연 〈다시 시작하기, 그리고 기껍게 계속하기〉 - 사뮈엘 베케트의 《몰로이》 를 읽고 (227쪽)
* 지친 영혼을 회복하는 길은 다양하겠지만 자신만의 시공간 속으로 침잠하여 고독에 잠길 때 오롯이 쉼을 얻는다. 쉼을 통한 사유와 여유로 힘을 얻는다. 다시 말랑해져서 내 앞의 사람과 세계를 향해 환대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문이나 창문을 열어라, 자, 고기와 생선 요리도 하고 가장 큰 거북이를 사고, 외지인들을 오라 해서 구석에 자리를 펴도록 하고, 장미나무에 오줌을 싸도록 하고, 먹고 싶을 때마다 식탁에 앉도록 하고, 트림도 맘대로 하게 하고, 하고 싶은 애기도 맘대로 하게 하고, 사방에 신발로 진흙을 묻히게 하고, 우리와 더불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 그게 바로 쓰러져가는 집을 활기 있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어머니 우르술라가 늙어 장님이 된 육제적 고독 속에서도 가문을 회복시키기 위해 소리친 말이다. 어쩌면 라틴 아메리카 전체를 향한 일갈인지도 모르겠다. 가족애를 넘은 인류애와 환대의 정신을 지닌 그녀에게서 구원을 본다.
- 정진희 〈고립과 근친상간의 비극〉 -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간의 고독》 (268쪽)
*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군은 나치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하이데거의 공식적인 강연과 강의를 금지했다. 교수들과 학생들의 끈질긴 탄원 덕분에 교내에서의 강의 금지 조치가 1951년 해제되지만 한 학기 뒤 그는 이 대학이 교수직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베를린대학으로부터 초빙이 있었지만 응하지 않고 은퇴 후 숲속의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대학교수가 종신직인 독일의 학칙에 비추어 볼 때 너무 이른 은퇴였다.
〈들길〉은 1949년 하이데거의 나이 60세이던 해 고향 메스키리히 출신 음악가 콘라딘 크로이처의 백주기 기념문집에 기고한 산문이다.
- 홍혜랑 〈존재물음, 철학의 밀림을 벗어나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수필 〈들길〉 읽기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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