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진보적 글쓰기 / 김갑수

칠부능선 2023. 9. 11. 13:34

'우리의 글쓰기가 사회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쓴 글쓰기 책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알아야 할 교양서적을 소개한 <백권대학>에서 중요한 이야기들을 중복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라는 말이 왜곡된 용어인 줄 알면서도 제목으로 쓴 것은 역사는 무조건 발전한다는 믿음의 진보적 사고가 아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역사를 좋게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는 진보를 말한다.

* 글쓰기라는 것이 마치 숙명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는 필자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심지어 글쓰기는 자기의 종교라고 말하는 필자도 있다.이런 말들에는 대체로 멍청한 착각이나 위선적인 자기 과대가 들어 있다. ... 나는 글쓰기를 유별난 일로 여기지 않는 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하는 것이다. 나는 1984년 소설 등단 이후 열댓 권의 책을 냈는데, 이 중 절반이 소설이고 나머지는 비소설이다. 나는 여기까지를 습작기로 간주하려 한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정말 좋은 소설을 쓰고 싶으며, 왠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있다.

- '서언' 중에서

겸손이겠지만, 습작기가 참으로 탄탄하다.

자신의 글, 남의 글에서 좋은 문장, 나쁜 문장의 실제 예를 들어가며 첨삭지도, 저지르기 쉬운 논리적 오류, 한국어의 품사 활용과 띄어쓰기까지 세세히 꼼꼼하게 알려준다. 누군가를 비판할 때 실명을 쓴다. 확실하고 단호하다.

'진보적 글쓰기'라기 보다 '글쓰기 정석'이다.

2009년 '2PM'의 리더 박재범에게 보낸 편지는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글이다. 박재범이 과거 인터넷에 올린 글로 인해 뭇매를 맞을 때 그를 옹호한 글이다.

* ... 이번에는 내 이야기를 조금 할게. 고등학교를 마친 나는 육군에 가서 아침마다 멸공구호라는 것을 복창하며 35개월이나 병역을 치뤘다네. 이것은 내 두 형님도 마찬가지였어. 그러니까 내 어머니는 10년 동안 아들을 군대에 보낸 셈이었지. 그리고 이런 삶은 대부분의 한국인이 공유해야만 했던 것이라네.

불행히도 이런 삶은 한국인들의 집단적 기억을 조작하여 현재를 이해하는 틀을 은연 중 만들었다네. 이것을 '은폐된 파시즘'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어. 이 은폐된 파시즘은 학교와 가정과 직장에서 국가주의의 세례를 거친 대중들의 정서와 결합되어 다시 큰 파장으로 증폭되어 기성세대건 신세대건 벌반 다르지 않게 되었다네.

자네를 몰아낸 것은 누리꾼들이 아니라 바로 이 괴물이었다고 생각해 주었으면 하네. 그러니 이 불우한 조국을 경멸만 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기 바란다네. 아니 재범 군이 그런 큰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네. ... (255 쪽)

재범 군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박재범은 지금 큰 사람이 되어서 돌아 온 듯 하다.

삶을 담은 글쓰기 - 담화수필이라며 소개한다. 수필의 미덕은 유머와 위트, 풍자,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스. 그리고 사회적 교훈성이 모두 담겨있어야 한다고 하며 본인의 유별난 가훈 <우리 집 가훈을 바친다>를 소개한다.

* 나는 성격이 무별난 편이다. 아니 유별나다는 말도 아깝다. 그냥 '지랄 같다'고 하면 더 적합할 것 같다. 성격이 지랄 같다 보니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안다. 게다가 나는 나로 인해 타인이 불편해 하는 꼴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불편한 사람과의 만남을 예방, 회피하면서 산다.

... 첫째 나는 제사를 빼고는 모든 의식을 싫어한다. 예컨대 생일, 기념일 같은 것들이다. 나는 내 생일잔치라는 것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결혼기념일? 이혼했다면 몰라도 지금 결혼해 살고 있는데 무슨 결혼기념일이란 말인가?

다음으로 내가 경멸하다시피 하는 사회적 관습으로 표어라는 것이 있다. 어려서부터 나는 길거리에서 너무나 많은 표어들과 마주치며 자랐다. 그게 보아 가훈이라는 것도 표어의 일종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 그런데 어느 날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아빠, 학교에서 가훈 적어 오래요."

"가~ 훈?"

"숙제에요."

순간 나는 화가 치밀면서도 속이 상했다. '아, 나로 인해 불편해 하는 사람이 또 생기는구나.' 하지만 나는 아이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의 담임선생은 의외로 집요했다. 너 하나만 가훈을 제출하지 않았다고 윽박질렀던 모양이다. 나는 타협하기로 했다.

"가훈은 꼭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정해야겠지?"

아이의 눈이 유난히 말똥거렸다.

"좋다. 그럼 우리집 가훈은 '살인을 하지 말자'다"

아이가 그 가훈을 학교에 제출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우리 집 가훈은 '살인하지 말자'가 되고 말았다.

...

박근혜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나는 박근혜 정권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불현듯 묘안이 떠올랐다. 나는 우리 집 가훈을 박근혜 정권에 헌납하기로 결심했다. 이것 하나만 지켜줘도 만족이다. "살인하지 말자!' (264쪽)

가족이야기 세 편

- 자신의 절명 시간을 알고 고마운 분들께 고기근을 선물하고 누워서 돌아가신 <그리운 아버지>, "아들 셋, 박 서방네 머슴살이 10년 시켰으며 됐지" 작은 것보다 큰 것을 생각하는 여인 <정치적인 나의 어머니>, 아버지의 유별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미역국을 선물한 딸 이야기 <환갑 축하의 난관을 뚫은 둘째>는 그야말로 유머와 풍자 속에 인간적 정취가 있다.

거듭 강조하는 글쓰기 자료로 제자백가의 사상과 마오쩌둥의 법치술을 간추렸다. 자신의 글쓰기 과정도 상세히 소개한다.

* 글쓰기라는 것이 이렇다. 아무리 써대도 만족이 없고 욕망이 식지 않는다. 나이와 함께 다른 욕망은 감퇴해 버렸는데 글쓰기만은 아직 예외에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는 글쓰기만큼, 기실 글쓰기를 가르치는 데에도 시간을 쓰며 살았다. 내 필생 작업의 반을 정리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보다 많은 이들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2016년 3월

(4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