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에서 4박을 함께 지낸 박설희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이다.
시집은 여행 중에 받았고, 산문집은 다른 분께 선물하는 것을 아침저녁 이틀동안 다 읽었다.
산문집 내고 인사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산문쓰기의 어려움을 절절히 알았다고도 하고.
읽으며 살짝 흥분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내가 아는 이름들이 많이 등장한다. 편안하게 펼치진 서정 뒤의 마음을 헤아리며 가슴이 싸아해지기도 했다. 참으로 든든한, 속 깊은 시인이다.
『가슴을 재다』
시인의 말
대지에 깊이 팬 상처들
아물지 않는 가슴들
어둠이 어둠을 삼키는 동안
덩굴처럼 이야기들이 자라나
계속되는 푸른빛
날마다 무언가를 구하는 가난한 하루가
또 시작되고
때때로 배반하지만
여전히
그리운 땅
그리운 사람들
그리고 어머니 ...
- 2021 가을 박설희
* 부리
바람을 입는다
두 눈에 해를
가슴에 달을 품고
맨앞에 내세운 부리
끝이 닳아 있거나 금이 가 있거나
그것은 집 짓고 사냥하고 깃털 고른 흔적
그 속에 감추어져 있다
찻잎 같은 혀
그리고 공룡의 포효보다
야무진 침묵
발을 뒤로 모으고
허공을 가로지를 때
앞세운다,
제 존재가 무엇보다 크고 귀중하다 일러주는
따뜻한 부등호
* 실눈을 뜨다
이제 막 읽고 쓰기 시작한, 엄마 또래 노인의 말
"비로소 실눈을 떴어요"
사 년째 병석에 누워 있는 엄마는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묵언수행 중인데
첫 글자를 배우고
구름 같은 가슴으로
나를 낳기 전
실눈을 떴을까
느린 가난에
신랑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한 엄마
미역을 따고 게를 잡으며
빛의 아이*를 낳고 싶었을까
늘 걸음마를 하는 것 같은데
이제야 내가 발 딩고 선 곳이 눈에 들어오는데
시를 쓴다고 엎드린 창밖,
하늘에 실눈 뜬 달이
세상을 더듬더듬 읽기 시작하고
푸른빛을 띤 세계가 마냥 펼쳐져 있고
*허수경 <오렌지>
『틈이 있기에 숨결이 나부낀다』
* 되돌아보면 지난 10여 년 사이에 우리를 충격과 놀라움에 빠트린 숱한 죽음이 있었다. 내가 그들을 죽인 것도 아니지만 뭔가 석연치 않고 개운치 않아 슬픔과 미안함과 심지어는 죄의식 속에 잠을 설치던 시간들이 있었다.
자신의 숨결을 느끼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옮기다가 문득 깨닫는다. 거친 호흡을 고르며 속도를 조절해가며 자신만의 고운 숨결을 찾아가는 길, 그것이 삶이라는 걸. 세상이 아무리 시끄럽고 굉음을 내며 미친 듯이 달려갈지라도, 죽음과 고통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71쪽)
* 빗소리를 들으며 김현경 여사와 일제 노리다케 찻잔에 담긴 커피를 마신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에 등장했던 바로 그 찻잔이다. 바느질을 해서 당시 유행하던 찻잔 세트를 구입한 것인데 세월이 무색하게 문양과 색깔이 선명하다. 틈을 봐 슬그머니 내가 가지고 간,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 있고 밑줄이 많이 그어져 있는 『김수영 전집』 을 내미니 '김수영의 여편네 김현경'이라고 적는다. 그러고 보니 김수영 시인도 시와 산문에 '여편네'라는 말을 종종 썼다.
"시에서 내 흉을 좀 많이 봤어요? 보석 같은 아내, 여보라는 말도 썼지만 가장 많이 사용한 게 여편네라는 호칭이에요. 그러니 여편네로 살아왔지요." (162쪽)
* 뱀이 장어를 삼키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슴관적으로 먹이를 거부하는 동물원의 뱀, 사육사가 뱀의 아가리를 벌리고 뱀 길이의 절반 정도는 돼 보이는 장어를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장어는 뱀의 아가리를 통과해 목구멍을 미끄러져 들어간다.
....
시멘트든 쇠기둥이든 거기 스미는 것이 생존의 한 방식이 되는 나무의 체위, 이런 종류의 체위에 관해서라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조개다. 꺼끌거리는 이물감이 제 살을 자극하면 그 통증을 덜어보려고 체액을 분비해서 결국 진주를 만들어낸다. 그것을 결코 체념이라 할 수 없다. 이 경우 조개는 스스로가 원해서 이물질을 품은 게 아니겠지만 때로 우리들은 자발적으로 까글거리는 타자들을 품기도 한다. 저마다의 체위로 이물감을 삭이는 방식. (166쪽)
*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라, 극한까지 밀고 가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습작기를 보내고, 시인이 되어서는 같은 소리를 시인 지망생들에게 반복해왔는데 정작 시를 읽을 독자를 배제해왔다. 시인인 내가 상상력을 펼칠 테니 당신들은 지켜보시오, 그래놓고 독자를 잊어버린 것이다.
작품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현실에 한 발을 디딘 상상력에서 오며 타인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뜨거운 가슴으로 반응하는 데서 온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내 시의 현장은 어디인가 살펴보며 다시 한 번 묻는다. 시는 무엇인가.
(171쪽)
* 사할린은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지만 사할린 한인들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 사할린과 한국 간 교류가 활발해질수록 한인들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다. 이 글은 그래서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다. 사할린에서 희망을 보았다고. 슬픔과 한을 딛고 당당히 뿌리내린 젊은 피들을 보았다고.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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