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헤르만 헤세 시집 / 헤르만 헤세 시. 그림

칠부능선 2023. 3. 30. 19:41

싱거웠던 헤세 시집을 다시 잡으며 그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유복한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온갖 악동짓을 하면서 유년을 보내고, 비상한 두뇌로 바젤의 명문신학대학에 다녔지만 규율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다. 서점 점원일을 하며 스물한 살에 시를 써서 자비 출판을 한다.

칼프에서 태어났으나 스위스, 바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스위스 국적을 얻는다.

맹렬하게 반전 운동을 하다가 독일에서 배척당하고 스위스에서 <데미안>을 출간하고 성공한다.

1962년 사망 후에 미국에서 헤세 붐이 일어난다. 평화가 시급한 일본에서는 50년대에 헤세 붐이 일었다. 이후 평화주의자의 뜻이 시대의 뜻이 된 것이다.

조국에서 배신자로 몰리고 외로운 처지에 알프스가 바라보이는 전원 생활이 시로 풀어나온다.

어린 시절 부터 '시인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던 결심할 정도로 시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뜨거웠다.

* 조락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고

그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웃음이 서름하고 바보처럼 들린다면

아, 그것은 영원히 먼 곳에 있다고 여긴

사악한 적의 경고로는

이제 그치지 않으리라.

연애하는 사람을 보고도

천국에의 동경을 느끼지 못하고

흐뭇하게 여기고만 걸어간다면

영원을 청춘에게 약속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시를

아, 조용히 포기하는 것이다.

욕을 듣고도 분개하지 않고

못 들은 척 태연히 있다면

아, 그때는 마음속에서

조용히 아픔도 없이

갑자기

성스러운 빛이 꺼지는 것이다.

(75쪽)

헤세는 권총 자살 시도와 사회부적응으로 정신병원을 드나들었다.

융을 만나, 그림테라피를 받으며 좋아졌다.

그의 수채화는 억압을 극복한 듯 평온하다. 그러나 그림 어디에도 '사람'이 없다.

뭘까?

왜일까?

미인

노리개를 얻은 어린아이가

그것을 바라보고 품고 하다가 망가뜨리고

내일이면 벌써 준 사람을 까맣게 잊듯이

너도 네게 준 내 마음을

귀여운 노리개를 그렇게 하듯 작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그것이 떨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지도 않는다.

(87쪽)

서유석의 노래 <아름다운 사람>이 여기서 나왔네.

*11월

만물은 지금 몸을 감싸며 퇴색하려 한다.

안개 낀 나날이 불안과 근심을 무화한다.

심한 폭풍우의 밤이 새고 아침이 오면 얼음 소리가 들린다.

이별이 울고, 세계는 죽음에 가득 차 있다.

너도 죽는 것과 몸을 맡기는 것을 배우라.

죽을 줄 아는 것은 성스러운 지혜다.

죽음을 준비하라 - 그러면

죽음에 끌려가면서도 더 높은 삶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151쪽)

* 어느 편집부에서 온 편지

"귀하의 감동적인 시에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옥고는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본지에는 약간 어울리지 않음을

심히 유감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어딘가의 편집부에서 이런 편지를 거의 매일 보내 온다.

신문, 잡지가 하나하나 꽁무니를 뺀다.

가을 향기가 풍겨 온다. 그리고 이 영락한 아들은

아무 곳에도 고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래서 목적 없이 혼자만을 위한 시를 써서

머리맡 탁자에 놓인 램프에게 읽어준다.

아마 램프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없이 빛은 보내 준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177쪽)

웃프다.

많이 들었던 얘기다. 저 편집자의 편지를 복사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쓰는 듯.

*니논을 위하여

바깥에는 별이 바삐 움직이고

모든 것이 불꽃을 날리고 있는데

이렇게도 생활이 암담한 나의 곁에

네가 있겠다는 것.

분망한 인생살이 속에서

하나의 중심을 네가 알고 있다는 것

이것이 너와 너의 사랑이

나를 위한 고마운 수호신이 되게 한다.

나의 암흑 속에서, 너는

참으로 은밀한 별을 느낀다.

너는 사람으로 다시 나에게

삶의 달콤한 핵심을 생각케 한다.

(185쪽)

마지막까지 함께한 헤세의 세번째 부인 니논 돌만. 18세 연하.

팬이자 비서로 헤세를 돕다가 부부가 되었다.

헤세는 여자 보는 눈이 없었던 듯, 아들 셋을 낳은 8살 연상의 첫 부인에게 악담을 들으며 모질게 이혼하고, 둘째 부인은 20년 연하로 개, 고양이와 호텔생활을 즐기는 여자다. 3년만에 이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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