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우문고판이다.
내 큰 손에 딱 잡히는 앙증스러운 판형이다.
선생님 뵌듯 반갑게 읽었다. 이미 읽은 작품도,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도 모두 새롭다.
임헌영 선생님 강의 때 자주 터지는 웃음을 만났다. 분명 활짝 웃었는데 뭔가 뒷끝이 있다.
골계수필을 떠올렸다.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모파상은 문학에 매달려 "나를 위로해 주오. 나를 즐겁게 해 주오. 나를 슬프게 해 주오. 나를 감동시켜 주오. 나를 꿈꾸게 해 주오. 나를 웃게 해 주오. 나를 두렵게 해 주오.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해주오. 나를 사색하게 해주오"라고 애원하다.
그러려면 누구나 푸근하게 쉬어가고 싶을 정도로 인간미가 넉넉하거나, 입심에 재기 넘치는 감수성까지 갖춰야 하건만 나라는 인간은 그저 무덤덤한 게 영 밥맛이니 글쟁이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
(7쪽)
*국민보건체조 + 낙지춤
출옥 후 내 국민보건체조를 재확인하고자 이 분야에 도사급인 작가 송기원의 소개로 단전 도장에 아주 열심히 다니면서 한 가지 목록을 추가하게 되었다. 바로 '낙지춤'으로, 온몸에서 힘을 뺀 채 낙지처럼 흐물거리며 아무렇게나 흔드어대는 아나키스트형 해체주의 춤이다. 좀 고상하게 '문어의 무도회'로 할까도 싶었으나 내 분수에 맞게 '낙지춤'으로 명명했다.
...
내가 즐기는 낙지춤 시간은 샤워 직후다. 온몸의 물을 훔쳐 내린 뒤 신체에 남은 물들이 증발할 때까지 한바탕 광무를 즐기고 나면 아예 수건으로 닦을 필요도 없게 된다. 의상대사는 세수 후 얼굴을 수건으로 닦지 않고 그냥 두었다지 않는가.
...
우리 전통 음악이나 사물놀이부터 유행가는 물론이고, 서양 클래식부터 최근의 랩까지 어떤 곡조라도 낙지춤과는 아삼륙이다. 음향시설이 없으면 묵언으로 좋하는 유행가 한 곡조 뽑으면서 하면 되고, 전혀 음악없이도 지장이 없다. 그냥 몸만 흔들면 된다. 모든 존재는 흔들리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개발한 국민보건체조와 낙지춤 만세! (63쪽)
* 눈동자와 입술
인생은 이렇게 미완성 행위의 축적 위에서도 예술을 잉태시킨다. 그 눈동자 그 입술은 정복되(하)지 않았든 되었든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헤어져 버렸기 때문에 그리움으로 승화된 셈이다.
사랑이란 이처럼 좌절당했든, 그 입문에만 서성거렸든, 성숙하게 농익었든 세월이 가도 남는 인생살이의 추억임을 박인환은 읊어주고 있으며, 그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사랑이 있는 한 이 시와 노래는 애송될 것이다. (124쪽)
* 도사 이외수와 김봉준
돌이 되고 싶은 대로 따라 주는 것, 돌의 뜻에 따라 우주의 섭리대로 그 소망을 이뤄주는 게 곡천 김봉준의 예술 창작 비결이었다.
아니 돌만이랴. 온 세상천지가 만물이 다 그 뜻대로 돌아가게 하는 게 상생의 섭리가 아닌가. 정치는 국민이 원하는 대로, 경제는 돈이 필요한 대로 흘러가게 해주듯이 문학예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소재가 원하는대로 써주는 것이 걸작일 것이다. 천하태평의 경지는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상대가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리라. (152쪽)
* 구천에 가도 변치 안는다
90여 분이며 살아생전에 아무리 소중하게 가꾼 육신도 한 줌 재로 변한다. 화장로 앞에서 그렇게 슬피 통곡하던 사람들이 이내 코를 팽 풀고는 눈언저리에 고인 눈물 자국을 지우며 갈비탕을 아구아구 먹으러 구내식당으로 향하는데, 왁자지껄한 그 행렬에 나도 끼어들었다. (201쪽)
마냥 즐겁게 읽을 일은 아니다. 살아온 시대의 증언에는 서러움과 아픔이 있다.
그러나 그 위에 유머와 해학을 입혀 단숨에 읽힌다. 깊이 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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