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받아주세요

칠부능선 2007. 12. 2. 16:16
      받아주세요

 

                                                              

  나 삼문 벼랑에 서서 *그대를 기다리렵니다.

  땅에 닿는 순간 내려온 것들은 황홀하다는 그대의 말에 동의합니다.

황홀한 죽음의 이불을 걷고 신생의 언어로 내게 오세요.

바람과 놀던 습성을 한량없이 지니고, 바람에 흩어져 없어진 것들 털어 버리고 그냥 오세요.

 

  벗에게 두 번의 절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내 죽음도 ‘몸 속 원자들 서로 자리 좀 바꿨을 뿐’이라고 가볍게 여겨주세요.

내가 먼 곳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 중에는 왜 하필 바쁜 시간에 부고(訃告)냐며

투덜대는 사람도 있을 테고, 잠시 추억을 더듬으며 가슴이 저릴 사람도 어쩌다 있겠지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애당초 어림없는 일이니까요.

 

  가끔은 마지막 글쓰기의 진부함에서 벗어나 감각의 액셀레이터를 밟아

당단풍 환한 한계령 절벽 너머로 내달려,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을 꿈꾸곤 합니다.

이생의 죽음을 넘어 저 세계와의 만남이 이어진다 해도 좋고,

이것이 끝이라 해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대의 풍장에서는 아무래도 버클리풍의 낭만이 풍깁니다.

바람과 노니는 모습에는 살아서 죽어가는 세계, 그 지엄한 경계마저 향기롭고 부드럽습니다.

그대는 같은 제목으로 14년간 70편의 연작시 풍장(風葬)을 완결했지요.

‘죽음에 관한 명상이자 희롱이면서 죽음에 대한 길들이기’였지요.

그대가 초월을 깨닫는데 14년이 걸렸다고 했지만 결국 초월은 초월하지 않는 곳에 있다고 했지요.

그렇다할지라도 나는 다만 그대를 경외감으로 바라볼 뿐,

처음부터 초월 같은 것은 꿈꾸지도 않겠습니다.

 

  그대가 부서진 시계에서 떨어뜨린 시간을 슬쩍 주워서 짧은 가을볕에게 보태주렵니다.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솔방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주었다’는

저 순정한 꽃의 열매를 더 여물게 익히라고 전하겠습니다.

 

  병 없이 앓는 날이 길어지면 땅에 닿을 시간이 가깝다는 것을 느낍니다.

장롱이며 서랍 속에 남아있는 많은 것들을 내보내야 하지요.

산 사람의 물건은 숨이 붙어 있지만, 죽은 자의 것은 주인이 먼 곳을 떠나는 순간 함께 숨을 놓지요.

책이며 옷가지며 쓸 만한 것은 서둘러 새 주인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새 주인과 정이 들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말년에 어머니는 계절이 바뀌면 성급하게 없앤 물건들을 다시 장만해야 했지요.

지나치게 깔끔했던 뒤처리를 보며 눈 흘기던 게 어제 일 같습니다.

내게 속한 것들이 너무 많네요. 어머니처럼 눈이 밝아지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벌써 숨이 가빠옵니다.

 

  부실한 대로 기꺼운 머리를 겨우 얹고 있는 긴 목은 늘 기울어 있었지요.

마음씨 후한 선배는 내 자세를 보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 겸손의 표징이라고 했지만 실은 가당찮은 얘기지요.

들끓는 속내를 들키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단단하게 굳은 어깨,

자주 칭얼대던 오른쪽 어깨에게 가장 미안합니다.

  새로움에 대한 열망은 부단했으나, 이루어놓은 것은 지리멸렬하여 회의와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등뼈는 위엄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받아주세요. 숨을 놓은 내 육신을 바칩니다.

  살아서도 한가롭지 않은 내 삶은 죽어서도 분주할 것 같습니다.

많이 혹사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쓸 만한 두 눈을 굳어지기 전에 누군가에게 얼른 주고,

그대가 두고 가겠다는 두 귀를 나는 지니고 가렵니다.

늘 열어 놓은 감성과 순명을 다 하는 귀의 자세를 깊이 새기기 위해서 곱게 거두어 가려합니다.

 

  다 쓰지 못한 뇌는 그대로 반납합니다.

궁리만 무성하고 딱 부러진 무엇 하나 건져 올리지 못한 아둔함마저도 애착으로 끌어안습니다.

때때로 머리와 엇갈리는 의견에도 잘 버텨준 가슴에게 대견함을 전합니다.

 

  매스라고하나요 그 벼린 칼로 가슴을 열 때 조심하세요.

늘 대책 없이 두근대던 심장 동네에서 아우성이 들릴지도 모르니까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웅얼거림으로 가득할 거예요.

그곳은 아직 연륜이 만들어 준 빗금을 새기지 못했거든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잡것들을 걸러내던 콩팥이며,

쉬지 않고 흐르던 대동맥이며 내동정맥은 오래된 고단함에서 비로소 해방 될 것입니다.

 

  포르말린에 잠겨 팅팅 불은 나의 몸은 몇 번 더 남은 마지막 할 일을 위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한 자락 남은 부끄러움도 묻고 내 안의 어설픈 여성도 버렸습니다.

실습실 해부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다만 뼈와 내장이 무사히 해체되고, 오래 기억되기를 바랄뿐입니다.

  기어이 삼문 벼랑에 다다라 황홀을 딛고 선 내가 보이나요.@


 

  * 황동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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