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정중히 사양합니다

칠부능선 2007. 5. 31. 21:26

                    정중히 사양합니다

                                                                                                                                                                                                                                               

 


 

  전시회장 입구에 꽃들이 줄을 섰다.

  맨 앞줄에 꽃대 몇을 겨우 내밀고 수줍게 서있는 소심, 그 옆엔 은은한 연록색 꽃잎을 매단 한란,

멀리서 온 덴파레의 오종종한 홍자색 꽃송이가 늘어졌다.   

  벽에 기대 멀대같이 서 있는 삼단 화환은 줄서기에서 열외다.

고 예쁜 것들, 아직 다 피지도 못한 것들이 모가지 댕댕 잘려서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플라스틱 목도리까지 두른 거베라, 색색의 소국, 백합들이 턱을 받치고 있다.

 

  그림 그리는 친구의 전시회 때마다 내몰린 꽃들이 안쓰러웠다.

전시회장의 꽃은 꽃 대접을 못 받는다.

꽃들의 화사한 자태가 전시품에 머물러야 할 눈길을 빼앗는다는 이유로 전시장 밖으로 쫓겨난다.

‘화환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초대장에 분명하게 써 있건만 ‘축하한다’고 확실하게 흔적을 남겨야

예를 다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기원을 알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결혼식이나 장례식, 이름 지어진 여러 행사장에 늘어 서 있는

3단 화환이다. 꽃이라고 다 꽃이 아니다. 꽃은 가려지고 목에 걸린 이름표가 먼저 고개를 내민다.

지극히 부담스러운 색깔의 리본이 나의 직책을 잘 보라는 듯 을러대고 있다.

꽃으로 만들어진 상품이 어쩌면 저리도 난감할까.

 

  이런 인사치레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궁금하다.

우리나라 전통일 리는 없고, 그렇다고 외국의 전시회장에서도 본 적이 없다.

화관이나 꽃다발을 보며 허세와 과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이 아닐까.

아니면 꽃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수요를 늘려주기 위한 갸륵한 배려에서 나온 것인지….

나는 왜 그 커다란 꽃무리 앞에서 꽃에 취하지 못하고 생뚱맞은 생각만 하는 건지.

꽃의 아름다움에 빠지기 위해서는 허리를 굽혀 얼굴을 마주하고, 고개를 숙여 향내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화환에 매달린 꽃들은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이 빤히 얼굴을 들고 쳐다보는 품새가

되바라진 아이 같다. 왠지 바른말을 해주지 못한 어른이 된 듯 겸연쩍다.

꽃이 다 꽃이 아닌 건, 졸업식장 앞에서 만난 다발에 묶인 꽃도 마찬가지다.

꽃들이 후줄근하고 구차스럽게 느껴지는 건 내 취향 때문일까.

한껏 부풀리고 과장된 포장은 꽃의 품위를 떨어트린다. 반짝이 스프레이를 뒤집어 쓴 꽃들이

아예 눈을 감고 있어 꽃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그렇게 묶을 수밖에 없는지.

그곳에서 나는 어처구니없이 꽃에도 격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꽃이 꽃을 비웃는다.

작을수록 귀한거야.

아니야, 여린 향일수록 인기야. 하하, 저 널브러진 꽃송이들 좀 봐. 행사장 밖이 소란하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전날 생일이었던 친구에게 준 것을 시작으로 바구니에 꽂힌 꽃들을

손님에게 몇 송이씩 나누어 주었다.

서너 송이 뽑아낸 장미와 카네이션은 그제서야 귀하고 어여쁘다.

받아든 손길도 조심스러우면서도 환한 표정이다.

  나의 남은 시간 안에 원하건 원하지 않건, 거쳐야할 몇 번의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정중히 사양해야 할 것이 어찌 화환 뿐 이겠는가.

온갖 찬사를 바쳐도 과하지 않은 꽃,

그런 꽃마저 제 자리에 분칠하지 않은 정한 모습이라야 아름답다.

 

  얼마 전 어머니 생신날에 망울이 많은 배나무 가지를 한 아름 사왔다.

중간 중간 꽃잎을 방실 열고 있는 흰빛이 어찌나 청초한지. 입이 큰 오지항아리에 듬뿍 꽂아 두고

눈 호사를 했다.

그날 늦게 시골에서 올라온 외숙모가 그 모습을 보며 탄식 한다.

  “아이구, 아까바라 저 쌩가지를 워쩌. 배를 한 접은 따것구마.”

  내가 내 꼴을 못 보는 법, 편편하던 자리가 어느새 면구스럽다.

 

 

<에세이문학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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