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갈월리의 겨울

칠부능선 2007. 2. 20. 18:25

                         갈월리의 겨울

 

 

 

밤 사이 흰눈이 쌓였다.

반겨줄 사람은 없지만 갈월리로 향한다.

텅 빈 듯 한적한 마을에 낮선 손님을 중 개 두 마리가 맞는다. 

순한 눈빛으로 거동을 살피며 조금의 거리를 두고 따라온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쌓인 눈은 초라했던 몰골을 풍성하게 가려준다.

흰색의 순수 앞에 찌든 일상이 녹는다.

잠시의 위안은 추억으로 남아, 오래도록 힘이 되어 주기도 한다.

느긋하게 기대서 하늘을 보는 여유는 이곳에서만 어울리는 모습이다. 

조급함으로 낀 마음의 때가 저절로 벗겨지는 듯하다.

 

할일을 마친 들녘에 세워 놓은 짚단은 제 몸을 기대고 하늘을 향해 귀를 열고 있다. 

쏟아질 눈과 비를 맞을 준비를 하고 바람이 전하는 말에도 귀를 연다.

무너져가는 다리 아래는 온전히 얼지 못한 냇물이 엉거주춤 흐르고

처마 밑에 달린 시래기 줄기는 바삭, 소리 낼 듯이 메말라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다.

들판에 해충도 꽁꽁 얼어야 하는데… .

동장군이 영 기운을 못 쓴다.

귀가 떨어져 나갈 듯 하고 얼굴은 불긋불긋해지는 긴장감을 언제 맛보았는가. 

쨍한 추위에 얼얼해지는, 정신이 번쩍 나는 상쾌함이 그립다.  

 

한겨울도 외풍이 없는 따뜻한 집에서 계절을 잃은 생활에 익숙해 있다.

안락함 속에서 서정을 버렸다.

넓지 않은 들녘에 아기자기 둘러앉은 마을에 무심히 개 짖는 소리가 퍼진다.

 

갈월리의 겨울은 위안이다.

볼이 에이는 찬바람이 불수록 마음은 따뜻해진다.

제든 그리움 안고 찾아가 긴 논두렁을 한바퀴 돌고 나면 위안이 되는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썩지 못하는 비닐의 비극처럼 삭이지 못하는 감상이 설 얼은 논두렁을 타고 걷는다.

세월에 덧없는 이끼만 끼어 육체는 둔해지고,

가슴이 무디어 가는 쓸쓸함을 풀어놓는다.

젖은 어깨 위로 바람의 손이 얹힌다.

 

아낌없이 잎새를 떨군 나무는 빈 마음으로

새로운 설계에 골몰하며 안으로 안으로 깊어지는 시간이다.

한 해의 땀을 거두고 다음 해를 위해 준비하는 이 시간, 비우고 다지는 것을 익힌다.

 땅의 힘을, 자연의 풍요로움을 받기만 한다.

 주기에 익숙한 자연 앞에서 받는 것에만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닌가.

 

 추억을 쌓기 전에 떠나온 고향은 아련한 그리움만으로 남아 있다.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안타까움 때문에 늘 먼 곳을 바라본다.

 고향이 바로 시골로 연결되는 것은 감성의 뿌리를 그 곳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 떠나온 고향은 구체적이지 않기에 더 많은 그리움을 주기도 한다.

 집 뒷꼍의 대나무 숲에서 쉬쉬쉬 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곧게 서 있는 대나무들도 외로워 바람이 불면 서로의 몸을 부비며 우는 것인가 궁금했다. 

 눈 쌓인 마을은 안개 떠도는 기슭처럼 사실은 불투명한 풍경이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 궁색해도 늘 아린 그리움으로 나를 살찌운다. 

어쩌면 나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겨울이 아무리 매서워도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뿌리를 향해 뻗어 가는 촉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멀지 않은 곳에 고향의 얼굴을 한, 마을을 찾은 것은 행운이다.

꿈속에서 그리는 고향은 지상에 뿌리 하나를 위해 존재한다.  

갈월리에 가면 그리움이 깊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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