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겨울이 위로다

칠부능선 2007. 1. 5. 17:26

 

              겨울이 위로다

 

 


 

                                                                                                                        

  지난 봄, ‘봄이 싫다’는 K의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짧은 시간에 파산에 가까운 돈을 잃는 사고를 당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주변 사람들을 불러 함께 하는 성격이어서 피해가 더 컸다.

언제나 밝은 모습에 넉넉하고 사려 깊은 그는,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다.

 

  누군가 경고했다. 고마움을 잊는 것은 배반의 조짐이며, 약속을 어기는 것은 도둑의 조짐이고,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은 파멸의 조짐이라고.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반드시 조짐이 있다고

하지만 사람을 순수하게 믿는 그가 불안의 조짐을 느꼈을 때는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후였다.

그는 고마움에 대해서는 넘치게 보답했고, 약속을 어기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잘못에 대한 반성보다 늘 최선을 다하는 전력투구형으로 느슨하게 사는 나를 일깨우는

삶의 모델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일의 충격이 너무 컸다.

유머 넘치고 쾌활하던 그가 한동안 웃음을 잃어버렸다. 건강을 잃을까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 외에 속수무책인 나의 무능이 부끄럽고 참담했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봄을 힘겨워한다.

내 안은 아직도 찬바람이 불고 꽁꽁 얼어 있는데 세상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죽은 듯했던 마른 가지에서 눈부신 봉오리들이 함성을 지르는 봄,

돌아오지 못할 것들을 보낸 상처가 도져 가슴이 쓰리다.

잃어버린 것이 떠올라 더욱 아프다.

내가 외면하고 있는데도 세상이 아무 일 없이 잘 굴러가는 것이 억울하다.

상처 깊은 사람에게 환하게 꽃피는 봄은 잔인하다.

  겨울이 멀지 않았다. 나무는 고왔던 옷을 아낌없이 벗고 빈 몸이 될 것이다.

지천이던 꽃들도 모두 스러지고 마른 가지만 누추해질 것이다.

기어이 흉흉한 몰골을 드러내며 내 시린 심경에 동조할 것이다.

죽은 듯 엎드려 보내는 침잠의 시간이 오히려 위로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사랑을 잃고, 재물을 잃어버리고,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 넘칠 것이다.

아무것도 잃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루하루 젊음을 잃으며 시간의 강을 건넌다. 저편 강기슭에 다다르는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 끝을 알 수 없는 도착지점을 향해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그 여정 중, 잃고 나서야 얻는 것이 있다.

재물을 잃고 난 후에 믿음과 부주의를 깨닫게 되고, 원치 않을 때 직업을 잃어버리면

세상 뒤편으로 내몰린 배신과 절망을 느끼지만, 새로운 시작을 맞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누구나 큰일을 당하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좌절감에 빠진다.

좌절감을 나만의 것으로 알고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병에 걸린다.

모든 결말을 다른 결말로 유도할 줄 모르는 집착이 사람을 상하게 한다.

피할 수 없는 좌절감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사람은

이 감정을 당당하게 표현하며 하나의 통과의례로 넘긴다.

  건강한 사람은 좌절감 자체를 객관화시키며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안다.

 

  좌절감을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박찬욱 감독의 가훈은 ‘아니면 말고’ 라고 했단다. 다시 적어오라는 아이의 담임선생의 말에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고 했다든가. 역시 남다른 위트가 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맡겨야 한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아닌 일을 재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내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집착은 물론, 열정까지도 놓아야 한다.

선택에 있어 자유로운 정신을 놓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미워도 다시 한 번 매달려 보는 용기와 인내도 필요하다.

 

  돌아보면 사람을 잃는 일보다 큰일은 없다.

사랑을 잃고, 재물을 잃을 때는 세상이 끝나는 것 같지만, 좌절감으로 괴로운 실체가 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다시 시작하는 일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다.

순탄했던 그의 생에 예정되었던 시련이라면 돈으로 치른 이 시련이 차라리 고맙다.

 

  인간이 불신의 동물인 동시에 맹신의 동물이란 말이 걸린다.

그래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갈등과 모순에 시달리면서 자신과 타인을 배반하게 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던 때가 좋았다.

불신이 머리에서 싹을 틔우고 맹신이 마음에 뿌리를 내릴까 두렵다.

불신이 굳어지기 전에 생각을 접고, 그 불신을 맹신하기 전에 마음의 문을 닫아야 한다.

남은 시간의 안녕을 위해 머리와 가슴에 잠시 휴식기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

 

  K는 머지않아 지금의 어려움을 그릇이 큰 사람답게 거뜬히 극복할 것이다.

자신의 일에 있어 치열하고 사람에 대해 따뜻한 성정이, 가라앉은 그를 곧 일으켜 세울 것이다.

  나는 느낀다.

저 뿌리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열정과 성취를 향하는 그의 힘찬 기운을.

  나는 믿는다.

돌아오는 봄에는 화신을 찾아, 신생의 바람을 찾아 아지랑이 일렁이는 벌판을 향해

힘차게 나서리라는 것을.

  그가 건재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창창한 봄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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