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에쿠우스

칠부능선 2006. 9. 2. 15:09
 


                                          에쿠우스



                                                                                                                         노 정 숙



  그의 등에 살짝 올라앉았다.

  나를 밀어내지 않을까 마음 졸이며 잠시 온몸이 굳었다. 미끈한 그의 잔등을 맨몸으로 부딪치고 싶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두툼한 안장이 그와 나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시켜 주었다.

  스페인의 어떤 마에스트로는 말 앞에 서기 전에는 옷을 단정하게 입고 목소리도 안정되게 하라고 했다. 말을 탈 때는 장군처럼, 여왕처럼 행동하여 말의 존중을 받아내는 것이 말 훈련의 첫걸음이라 했다. 그러나 내가 탄 몽골말은 덩치가 부담스럽지 않아서인지 그런저런 예의를 생략해도 금세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는 내게 인사라도 하는 듯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어댔다. 그러나 실은 파리를 쫒는 몸짓이었다. 가끔 앞발을 구르기도 하지만 위협적이지는 않다.

  짙은 밤색의 매끈한 긴 얼굴은 매우 사색적이다. 속눈썹 그늘이 깊은 눈은 꿈꾸는 듯 몽롱하다. 넓고 반듯한 이마는 분별력 있어 보이면서도 육감적이다. 바짝 세운 귀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도 움직인다. 귀가 동시에 앞 쪽을 향할 때에는 무엇엔가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보일 때며, 귀가 뒤쪽으로 향해 있을 때는 경계경보 - 극도의 긴장상태라고 한다. 편하게 쉴 때나 졸 때 귀는 양쪽으로 힘없이 벌어진다는데, 세운 귀를 보니 그도 내게 긴장하고 있나보다. 나를 맡기며 힘을 빼려는 것을 감지했는지 곧 푸우푸우 거리며 입 장난을 친다.

 

  말을 타고 모래가 많은 들판을 걸었다. 네 발의 진동에 온몸이 출렁거린다. 원을 그리며 걷는 동작이 기본 연습이다. 잔잔한 리듬에 익숙해질 무렵 두 발로 달리듯 걷는다. 투스텝 발랄한 춤동작 같다. 진동이 격해지며 가슴이 요동친다. 허리를 세우고 허벅지는 잔등에 붙인다. 언덕을 오를 때는 몸을 앞으로 수그려준다. 거꾸로 비탈을 내려올 때는 몸을 살짝 뒤로 제쳐준다. 그가 받을 힘을 분산시켜주는 것이다. 고삐를 잡은 손으로 방향과 속도를 조절한다. 돌리고 싶은 방향으로 고삐를 조이고 속도를 줄이거나 서고 싶으면 고삐를 짧게 잡아당긴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나를 태운 그는 많은 시간 훈련을 받았음직하다. 아니면 천성이 순하고 너그럽던지. 꼬리를 흔들거리는 폼이며 반들거리는 윤기를 보니 건강상태도 좋은 듯하다. 첫 대면의 긴장으로 필요 없는 힘이 들어가 어깨가 뻐근하다. 무엇을 하든지 힘을 빼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다시 느낀다.

 

  하늘그림과 함께 목동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는 맑은 물을 건넜다. 허브가 지천인 벌판에 이르렀다. 발걸음마다 묻어나는 허브향에 취해 있는데 그는 걷다가 코를 박고 허브를 뜯어먹는다. 그의 엉덩이에 채찍을 가한다. 순간 그는 화들짝 놀란 듯 달린다.  속력을 더하기 위해 양발로 옆구리를 쳐주기도 한다. 이것이 박차를 가한다는 것인가, 그러나 내 발은 민발이다. 날카로운 박차는 없다. 나는 말에서 서는 자세로 마부에게 배운 ‘츄 츄’를 외친다. 빨리 달리라는 뜻이다.

  가파른 언덕을 모래먼지 날리며 잠시 달렸다. 귀가 멍하니 머릿속이 하야진다. 멀리 지평선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날아가는 듯, 어떤 절정에 이르러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제법 긴 언덕을 내달려 오르니 그도 힘이 드는지 한참을 헉헉댄다. 언제였던가, 어디서였던가, 왠지 이 거친 숨소리가 귀에 익다.

 

  사흘째 새벽, 잔등에 갈기털을 세우고 그는 내게 등을 허락한다. 멀리서 볼 때 멋지게 휘날리던 갈기털이 그렇게 억센 줄은 몰랐다. 한 뼘 정도로 잘라 모양을 낸 갈기털을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넨다.

  긴 목을 흔드는걸 보니 기분이 좋은가보다. 달릴 때는 목의 각도에 따라서 보폭을 조절하며 속도를 맞춘다. 목을 올리고 아래위로 흔들며 겅중거리면 다리는 리듬을 탄다. 이때 진동이 가장 심하다. 도리가 없다. 그의 잔등에 바짝 붙어 함께 흔들거려야 한다. 쭉 뻗은 네 다리를 관제하는 것이 긴 목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에게는 목이 긴 짐승의 수려함과 위엄이 있다.

  건들건들 말위에 몸을 맡기고, 평원을 가로질러 허술한 아스팔트 도로를 건넜다. 양과 염소, 야크를 방목하는 초원으로 들어섰다. 무리지어 있는 순한 눈망울들은 경계태세를 모른다. 길 없는 초원에 어디든 나아가는 곳이 길이다. 억새밭을 지나니 잔돌이 웅성거린다. 들판에는 다섯 잎이 또렷한 하얀 꽃이 빛난다. 손톱만한 보라색 꽃, 오종종 수양매 닮은 노란 꽃이 정겹다. 감탄하는 소리에 반응하는 건지, 야생화 들판에서 속도를 줄이는 눈치도 있다.

 

  크고 작은 웅덩이와 돌 때문에 어제처럼 달리지는 못했지만 그를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속도를 버리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더 많다.

  재갈 물린 그의 입이 걸린다. 말 탄 자와 말의 유일한 소통 수단, 아니 전달의 수단인 고삐를 통해 전해지는 압력과 자극을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하는 예민한 잇몸이 안쓰럽다. 그러나 지령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간혹, 등 위의 사람을 떨어뜨리며 거부하기도 한다. 야성의 본능을 버리지 않은 그에게는 함부로 할 수없는 도도함이 있다. 나는 간간이 갈기를 만지며 등을 쓰다듬어 준다. 혹시 나를 밀어낼까봐 미리 친근한 몸짓을 보낸다. 미끈한 몸피는 한 군데도 허술한 구석이 없다. 치장 없이 황홀한 몸, 모든 동물 중 가장 잘 생긴 족속이다.

 

  교감을 꿈꾸기엔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시간이었지만, 연신 노래를 흥얼거리던 마부의 순질한 미소와 거침없는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오래전 가슴에 새겨져 있던 풍경처럼 낯익다.

  가슴 한켠에 격랑을 몰고 오던 그 근육질 관능에 얼마나 취했는지 모른다. 방목의 벌판마저도 벗어나고 싶었을까, 해거름이면 돌아오는 목동의 말발굽 소리가 왜 그리 슬프게 들렸는지 나도 모른다.

  말 위에 있던 내내 느린 필름으로 돌아가는 형상이 있었다. 광대뼈 선명한 얼굴, 황토빛으로 그을은 그들과 함께 달리던 내 아득한 전생을 읽은 것을 아무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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