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진부와 통속

칠부능선 2007. 4. 26. 16:47

                                 진부와 통속

 

                                                                                                                - 노 정 숙

 


    ‘실망하지 않고 사는 것.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더라도 사랑을 간직하고 사는 것.

    시작하는 것.

    기도하는 것.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것’


  묵상집의 짧은 글이 졸고 있던 나를 깨웁니다. 

  실망하지 않고 어떻게 이 진창을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실망을 각오하고 부딪치며 나아가렵니다. 실망은 기대감에 비례하지요. 1등만을 바라는 아이가 2등을 하면 실망하지만, 중간만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2등 한 아이는 천재지요. 실망이 두려우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지요. 때로는 기대감보다 연민이 쓸모 있지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어디 사랑뿐이겠습니까. 이기심 때문에 잃어버린 신뢰, 나쁜 습관으로 멀어진 건강, 무디어진 감성 탓으로 잃어버린 호기심, 타협에 익숙해지면서 내버린 용기, 어느덧 이런 것들과 친해져버렸습니다.

  지난 주 길에서 잃어버린 지갑은 잃어버리는 순간 바로 잊어야 하는 사소한 것 중 하나지요. 나를 떠난 사랑을 고이 간직하라고요. 그 쓸쓸하고 황량함을 모르는 소이지요. 화인(火因)이 되어버릴 그 갈증을 어찌하라고요. ‘서로를 위해서’ 라는 옹색한 위선은 버리겠습니다. 되돌아오지 않는 사랑은 즉시 잊어주겠습니다. 이젠, 서로를 위하지 않으렵니다.

 

  시작 앞에 용감한 사람은 늘 청년입니다.

사람이나 일에 대한 기대감을 접은 지 오래입니다. 지금까지 얽힌 인연을 지속하는 것만도 벅찹니다.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달라고만 하는, 거지근성 가득한 기도밖에 올리지 못하는 내 가여운 통속(通俗)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젠, 조금 더 무모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렵니다.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라고요. 굳어진 선입견과 낡은 생각의 때가 덕지덕지 낀 이 가슴을 가지고 말입니까. 생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내 몸은 진부(陳腐)와 맞닿아 있지요.

  아직 고개 숙이지 못하는 정신과 고개 들지 못하는 몸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그 진부를 넘어설 자신이 없습니다. 내 정신과 몸조차도 균형을 잡지 못하는 이 모양으로 사물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내가 흘린 땀과 눈물의 양을 정직하게 헤아려보면서, 내 삶과 글이 어느 정도 불량품이거나 함량 미달인 것을 인정합니다. 치열하지도, 뜨겁지도 못했던 시간들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늘 하던 익숙한 고백성사는 이제 하지 않겠습니다.

돌아온 탕아를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내 고백을 듣는 이가 대어(大漁)를 낚았다고 쾌재를 부를, 새로운 고백성사를 준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합니다. 

  두려움을 접고 대죄(大罪) 속으로 나아가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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