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마두금 가락에 날다

칠부능선 2008. 5. 17. 00:34


                            마두금 가락에 날다


                       

                                                                                                                              노정숙


  울란바타르 시내의 한 레스토랑에서 이른 점심을 먹은 후였다. 몽골 청년 둘이 들어오더니 한 사람은 피아노 앞에 앉고, 한 사람은 처음 보는 악기를 안고 의자에 앉았다. 그것은 마두금이라는 몽골의 전통악기로 몸통은 나무와 말가죽으로 만들었으며, 현은 말의 목털과 꼬리털을 엮어 만들었다고 한다.

  긴 생머리를 뒤로 묶은 순하게 생긴 악사는 눈을 지그시 감고 현을 긋는다. 애절하게 흐느끼다 잦아드는 음률이 일순 휘돌아 벌판을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와 섞인다. 단 두 줄의 단순하게 생긴 악기에서 묘하게 휘어지고 꺾여 나오는 음색이 예사롭지 않다. 잔잔한 모래언덕을 누비고 드넓은 초원을 달려온 바이칼 호수의 바람소리가 저럴까. 순간, 회오리바람이 온몸을 어리감고 지나간다.

  마두금 소리는 대평원을 누빈 말이 가쁜 숨을 고르고 지평선 맞닿은 벌판을 지나 갈기를 날리며 하늘을 나는 듯하다. 절정에 다다랐으나 격렬하지 않고 평온하다. 가슴이 확 열린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기진하다 아금받게 이어지는 변주에 거침없는 힘이 느껴지는 저것은 무엇일까. 그 어떤 힘이 나를 금세 대초원으로 데려다 놓는다.


  말굽 소리에 휘감긴 바람이 묵은 기억을 뒤흔들며 아득한 전생으로 이끈다.

  나는 등짐을 잔뜩 싣고 사막을 건너는 쌍봉낙타였다. 어느새 젖비린내와 진한 말똥내가 뒤섞여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때도 나는 어미였다. 가슴 밑바닥에서 슬픈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곳 사람들이 사막에서 풍장을 할 때마다 내 앞에서 내 어린 것을 함께 죽였다. 표지판 삼을 것이 없는 드넓은 사막에서 사람들은 지도 대신 내 뛰어난 기억력을 이용했던 것이다.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법, 나는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먼저 간 어린 것을 생각하며 가슴이 에인다. 사람들은 내 눈물을 보며 조상의 무덤자리를 찾지만, 나는 상처에 상처를 더한다.

  그 후에부터 난산의 고통 끝엔 언제나 자식을 잃은 비통함이 더해진다. 산후에 갓난 새끼를 밀어내는 내게 모성애가 없는 동물이라고 비난하는 것쯤은 참을 수 있다.

  사막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억센 가시가 촘촘히 박힌 낙타풀이다. 사막을 견디는 처절한 생명력과 서글픈 운명이 우리는 서로 닮았다. 낙타풀을 씹으며 상처투성이가 된 몸,  이 천형과도 같은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오래된 슬픔에 빠져있을 때 나를 위로하고 어루만져주는 것은 오직 마두금의 구슬픈 가락이다. 마두금 연주를 들으며 한참 눈물을 흘리고 나면 격렬했던 고통이 한풀 수그러진다. 채이고 부대끼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비칠비칠 다가오는 어린 것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슬픔은 옅어지고 나는 어린 것에게 젖을 물린다.

 

  앵콜을 외치는 요란한 박수소리에 놀라 전생을 치달리던 아득한 꿈에서 깨어났다. 연주를 끝내고 나가는 악사를 붙잡았다. 몽골 청년 투멩바이에르는 올해 스무 살로 몽골 음대에 다닌단다. 수줍은 외꺼풀 눈에 광대뼈가 나온 볼이 정겹다. 아기를 보듬은 듯 안고 있는 마두금의 끝부분에 말머리 장식이 화려하다. 살집이 좋은 청년의 무릎까지 오는 황금색 전통의상과도 잘 어울린다.

  삽시간에 나를 시원으로 몰고 가던 그 곡은 ‘몽골의 소리’라고 한다.

  아, 그랬구나. 몽골의 소리에서는 유목민의 허허로움과 막힘없는 자유의 기상이 동시에 전해졌다. 스러졌다 일어나고 잔잔하게 굽이치다 내달리는 칭기즈칸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 태고의 감정을 뒤흔들며 종횡무진 하늘을 내달리던 그 음률을 타고 전해오는 소리가 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배운 게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칭기즈칸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남의 말에 귀를 세우는 것 보다 나를 드러내고 싶은 입이 더 분주할까봐 두렵다.

 

  다시 이 동네의 선거철이다. 이 시대 리더의 덕목을 칭기즈칸의 일갈(一喝)에 기대는 건 너무 낭만적인가. 저 번득이는 헛된 욕망을 잠재워야 한다. 웃는 얼굴로 서로의 뒤통수를 갈기는 이 비열한 동네의 아우성을 가라앉혀야 한다. 내게도 나를 극복하고 싶은 욕망이 아직 있는가. 때때로 울컥거리는 이 감정은 무엇인가.

  유목민의 고단함을 어루만져 주고, 낙타의 깊은 상처를 위로하여 눈물을 흘리게 하는 마두금의 애절한 음률이 그립다.

  시시로 반복되는 이 시대의 불신과 배신을 위로 해 줄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하늘 길에 다다를 그 어떤 절대의 가락이 지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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