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비로소 선언함

칠부능선 2006. 3. 28. 22:53
 

비로소 선언함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가족은 아니다. 어떻게 아느냐고, 가족들은 모두 열쇠를 가지고 다닌다. 못들은 걸로 한다.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방이 몹시 어지럽다. 책과 신문이 서로 자리다툼을 한다. 벗어놓은 옷들은 제자리를 잃고 여기저기서 히히덕거리고 있다. 이럴 땐 시치미 떼는 게 상수다. 깔끔한 성격에 견디지 못하는 남편이 치울 것이다.

  컴은 켜 있을 때만 쓴다. 그리고 쓰고 나서는 절대 끄지 않는다. ‘시작’을 누르고 화면이 뜨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귀찮다. ‘끝내기’를 기다려 ‘확인’을 누르고 또 다시 기다리는 시간이 싫다. 성질 급한 딸이 궁시렁거리며 끌 것이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3․1절이라고 국기를 게양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연거푸 서 너 번이 나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도 잠시 버티고 있다가 어기적거리며 나가서 국기를 찾는다. 국기함이 비었다. 베란다에는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부지런한 아버님이 벌써 달아 놓으셨다. 어쩌면 예상한 일이다.

  부엌에서 소리가 난다. 아직 저녁을 하기는 이른 시간이지만 어머니가 나오셨나 보다. 무감각에 뻔뻔 뻔뻔함을 더해서 버틸만큼 버틴다. 가능한 한 늦게, 겨우 나간다. 아직도 부엌일을 주관하시는 어머니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 그래도 하는 건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곰국을 끓인다. 계속 떨어지지 않게 끓인다. 하루에 한 끼, 혹은 이틀에 한 끼 아침국이 해결된다. 싫은 사람은 그냥 물 말아서 먹는다.

  밤이다. 야행성 아들과 DVD를 본다. 별로 재미없지만 바꾸기가 귀찮아 서로 눈치만 보며 그냥 본다. 다이어트를 구실로 부실하게 먹은 속이 뭔가를 원한다.

  “아들, 네가 끓이는 맛있는 라면 먹고 싶어.”아들도 만만찮게 버틴다.

  “밤에 먹으면 얼굴 부어요. 건강도 안 좋고요.”

  “그래두 ~ 지금 먹고 싶어 ~” 조금 애교도 부린다. 아들은 큰 키를 일으켜 세워 부엌으로 나간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거슬려도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된다. 잠시 후 소반에 라면전용 양은냄비가 얹혀 들어온다.

  집안 모임, 친구 모임에서 요즘 몸이 무겁다고,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엄살을 부린다. 이틀이 지나니 큰어머니께서 다녀가라 하신다. 맛깔스러운 김치 두 통을 주신다. 뒤통수가 당기는 건 잠시 묻어 버리고 흐뭇한 마음으로 받아온다. 이어서 음식솜씨 좋기로 소문난 친구가 밑반찬을 잔뜩 챙겨온다. 역시 미안한 마음은 비켜두고 뿌듯하게 냉장고를 채운다.

  이 귀차니스트 엄마 때문에 아들 딸 혼사길이 막힌다 해도 하는 수 없다. 언제나 되풀이되는 뒷공론은 그들의 몫이다.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는 남의 속까지 어찌 헤아리겠는가.

  눈치를 보는 것은 정말 귀찮다. 미루어 짐작하기는 더욱 귀찮다. 

  50대가 된 나, 선언한다.

  이제는 나 이외의 것에 진을 빼지 않겠다.

  나 이외의 일에 참견하지 않겠다.

  이제, 비로소 혼자 놀 자격이 있지 않은가.

  기어이 귀차니즘의 경지에 이르러 때때로 투사가 되는 난처한 열정을 가차 없이 무지른다.

  그냥, 내가 좋은 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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