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사랑은 없다

칠부능선 2006. 3. 21. 18:39

                               

                         사랑은 없다



    

                                                                                                      노 정 숙



"오늘은 외로울래요”
점심 약속을 취소하면서 후배가 한 말이다. 전화선 너머로 한껏 가라앉은 힘없는 목소리가 전해오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드디어 너도 외로움을 가지고 놀겠다고. 그의 그윽한 눈매가 더욱 깊어질듯 하다. 자신감 넘치고 여유 만만하던 그도 삶의 본질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어느새 알아버렸는가 보다.

사랑 때문에 평생 외롭게 살다간 다이허우잉을 생각한다. 전작주의도 아닌 나를 「사람아, 아 사람아」를 읽고 그의 다른 작품 모두를 찾아서 읽게 한 작가다. 친구에게 맡긴 노트가 사후 18 년 만에 책으로 묶여 나왔다. 가슴 저리고 아픈, 구설수 많았던 사랑이 공개되었다.
허우잉은 스승의 논문에 드러난 인도주의적 관점을 고발하라는 당의 요구에 주저 없이 "스승은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 사랑한다" 며 스승이 사상을 비판한 열성 공산당원이었다.
문화대혁명의 중심에 있던 허우잉은 검은 시인으로 비판대상이던 원제를 조사하다가 사랑에 빠진다. 이혼을 당한 여자가 아내를 잃은 남자와 사랑하는 것은 당원으로서 사상성을 의심받아야했던 30년 전 중국, 15세 연상의 대시인 원제와의 사랑은 당국은 물론 주변인들의 온갖 비난과 억측을 감수해야만했다. 두 사람은 당국에 결혼신청을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반혁명적인 행동으로 비판을 받는다. 이들의 사랑이 당국의 반대로 끝나게 되자 원제는 사랑의 결백을 증명한다며 죽음을 택한다.
허우잉은 원제를 만남으로 휴머니즘에 눈뜬다. 인간이 이념의 도구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당의 활동을 접고 괴한에게 살해되기까지 교육과 창작에 전념한다. 그는 작품에서 정치적 억압과 교조주의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죽은 연인을 기리며 쓴 「시인의 죽음」은 죽음을 넘어서게 한다. 원제의 정신은 더 이상 자아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지구상의 2, 3만여 종의 직업 중에 삶 자체가 직업인 것은 오직 시인이다. 그래서 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도 시인이다.
그들이 함께 읊던 소동파의 시 ‘다만 오래오래 살아, 천 리에 고운 달을 함께 봤으면’은 얼마나 서늘한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예감했던가.
다만 오래오래 함께 살며 세상의 구차함을 견뎌야 했다.
다만 오래오래 함께 살며 이념의 비루함을 이겨야 했다.
그들은 오래오래 함께 살며 서로 낡아 가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
대시인은 사랑을 지키지 못한 어리석은 한 남자일 뿐이다. 마지막 자존심 때문에 연인의 자살을 막지 못한 허우잉은 열망과 확신을 구별하지 못한 무구한 이상주의자일 뿐이다. 그들의 사랑도 어쩌면 자기연민의 치열함이 아니었는지.
다만 ‘함께, 살아’라는 땅의 언어만이 나를 위로한다.

가을이 색을 놓고 있다.
달은 다시 차오르기 위해 비우지만, 다시는 얻을 것 없다 해도 놓아야 할 시간 앞에 외로워질 일만 남았다. 비껴갈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얼마간의 위선의 옷을 입고, 또 얼마간의 허영심도 발휘하며 외로움을 즐겨야 할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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