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동백과 목련

칠부능선 2006. 3. 21. 18:27

동백과 목련

노정숙

 

 

목련을 한 다발 사왔다.

입이 큰 항아리에 그대로 꽂았다. 봉오리 매단 꽃가지에 이른 봄이 묻어왔다. 하룻밤 사이에 꽃송이 두 개가 벙글었다. 잎도 없는 가지 끝에 매달린 봉오리가 잘 간수한 붓털처럼 미끈하다.

목련을 볼때면 마음씨 좋은 여자를 떠올린다. 오래 애태우지 않고 보시시 열리는 우윳빛 살결의 꽃잎, 뾰족 내민 잎은 망설임 없이 활짝 웃음을 터트린다. 적당히 핀 목련은 고결하고 단아한 기품이 있다. 범접할 수 없는 단호함까지 비친다. 서늘 바람이 겨운 봄 밤, 달빛 아래 목련의 모습은 너무도 순결하여 바라보는 마음마저 저리다.

이쁘다. 이쁘다. 황홀한 칭찬에 달뜬 꽃잎은 흥에 겨워 허리춤을 꺾는다. 이내 폴폴 꽃잎을 모두 젖혀 내보인다. 목련이 가는 모습은 민망하다. 유백색 정결한 꽃잎은 간데없고 상처투성이 누런 꽃잎은 꽃이 아니다. 속곳까지 훌러덩 벗은 몸, 분분 날려 저기여기 뒹구는 모습은 이미 꽃이 아니다.

이쯤에서 나는 동백을 생각한다.

동백은 반지르르 윤기가 두터운 진록색잎 사이에 촘촘히 꽃봉오리를 맺는다. 가을부터 맺은 여문 봉오리는 흰 눈을 머리에 이고도 얼른 꽃잎을 열지 않는다. 빨간 꽃잎에 흰 술을 세우고 그 끝에 노오란 꽃밥을 매단 빛깔의 조화를 볼 때까지는 긴 기다림이 필요하다. 동백꽃은 꽃잎이 반쯤 열리면 다 핀 것이다.

마음씨 후한 목련처럼 활짝 웃지 않고 규중처자처럼 수줍은 듯이 미소만 머금고 개화를 마친다.

핏빛 열정은 안으로만 삭이고 끝까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동백꽃이 이울 때에는 붉은 빛깔 간직한 채 통째로 목을 탁 꺾는다. 누굴 닮았나, 저 성질머리. 동백은 고스란히 꽃인 채로 간다. 끝내 흐트러지지 않는 정절미가 도도하다.

고모님을 생각하니 살아온 모습은 목련인데 죽는 모습은 동백이다. 고모님은 늘 '잠자듯이 가야지'라는 말을 달고 사셨다. 85세를 며칠 앞두고 아침에 목욕을 하고 점심 잘 드시고 낮잠 자듯 혼수에 들었다.

가까운 곳의 가족들 모두 다녀가고, 멀리 있던 셋째 아들이 당도해 곁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야 숨을 거두셨다. 혼수상태 사흘만이다.

바람처럼 떠돌던 천하의 한량 남편과 남편이 데리고 들어온 작은댁들과 그 아이들까지 감싸며, 말 많은 종가宗家를 평정한 고모님이다.

나는 고모님의 환한 얼굴을 대하면서도 가슴엔 풀지 못한 한이나 미련이 가득하리라 여기며, 언뜻언뜻 그늘을 살폈다. 남편을 공경하고 시부모님을 지극하게 모시며, 불평이나 타박이 없던 고모님을 바라보면 불가한 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고모님의 평온한 죽음을 보니 가슴이 숯덩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내 꾀바른 기준이었다. 고모님은 진정한 포용과 용서로 사랑이 넉넉한 삶을 사셨던 것이다.

그 우아하던 목련이 몇 잎 남은 꽃잎으로 겨우 목을 매단 채 누렇게 시드는 모양새와 달리 동백꽃은 뒤끝이 단호하다. 청순한 자태의 목련과 정열적인 빛깔을 가진 동백의 엇갈린 성정을 보면 혼돈이 온다.

살아온 모습과 떠나는 뒷모습이 같지 않을 때 바라보는 마음은 얼마나 난감한가.

단번에 목을 꺾는 동백도, 시든 꽃잎 몇개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목련도 모두 온 곳으로 돌아간다.

꽃 진 자리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것을. 꽃 진 자리에 여린 잎새 움트고, 꽃 진 자리에 옹골진 열매를 맺으며 끝없는 순환의 고리을 잇는다.

때로는 보는 사람이 민망할지라도 이우는 목련처럼 흩어져도 좋겠다. 훨훨 벗어 속 깊은 무엇이 나온다면 칠레레팔레레 나부껴도 좋겠다. 꽁꽁 여민 채 풀지 못하는 동백의 열정이 무슨 소용 있는가. 한 번도 활짝 웃지 못하고 가는 언 가슴, 고운 뒷모습이 아리다.

내 안에 목련도 동백도 다 이울어가는 것을.

 

(2006년 현대수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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