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불쌍한 여자

칠부능선 2006. 3. 28. 20:44
  

     불쌍한 여자

  

                                                    

        

  "그 여자 너무 불쌍해."

  "왜."

  "그 여자는 남편하고 자식밖에 몰랐대."

  "그건 나도 그래."

  "아니지,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문상을 다녀온 남편과 나눈 말이다. 내 동갑인 동료의 부인이 유방암으로 3년 동안 투병하다 죽었다고 한다. 가족밖에 모르고 살았다는 여자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남편,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없을 수도 있는 전업주부를 왜 불쌍히 여긴단 말인가. 건강이나 환경이 허락지 않는 것을 말한다면 몰라도 그녀의 선택이 불쌍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엇갈린 대화에 서로 세뇌되어 살아온 나날이 느껴진다. 

  직장생활도 못해보고 일찍 결혼해서 바로 아이 낳고 그야말로 집밖에 모르며 살았던 나의 지난날은 잊었는가. 알뜰하게 계산 못하는 내 허술한 경제관은 후덕함으로 포장되었다. 공상이나 책읽기가 취미인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가족의 늦은 귀가에도 잔소리하지 않는 이해심 많은 아내와 엄마가 되었다. 흔한 애교도 없이, 곰상스럽지 못한 며느리노릇도 나답다며 당당하다. 돌아보니 너그러움을 가장한 직무유기가 많았다. 


  겨우 만들어 놓은 말들이 날아가 버렸다. 저장, 저장을 눌러가며 확인, 확인을 했어야 했다. 날아가 버린 내 말들은 가슴에 깊이 새겨있지 않았던 가벼운 것이었나 보다. 하얗게 증발해 버린 것을 보면 그 가치라는 것이 신통치 않음에 분명하다. 손이 닿지 않는 높이의 포도나무를 보며 '저건 시고 맛이 없을 거야' 하며 포기하는 것,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선택인양 의연하다. 이룰 수 없는 것,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도전 앞에서 쉽게 포기할 때 쓰는 변명이다. 

  며칠 혹은 몇 달간 겨우겨우 꾸려놓은 글을 잃어버렸을 때의 황당함을 여유로 포장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앞뒤 없이 흥분하던 큰일도 반복되다보니 이제는 도를 깨우쳐 내성이 길러진 듯하다. 부실한 속뜰엔 감동을 무디게 하는 잡초만 무성해졌다.

  내가 기다리던 것들 ― 설렘과 격정, 그리움, 그런 것들이 내 안에 뿌리를 내렸는지 싹이 자란다. 그 싹은 이내 시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내 열정만으로 키워내야 하는 그것들을 언제까지 끌어안고 있을지 나도 모른다. 

  그를 만난 순간, 다시 도진 심장병환자처럼 심장이 벅차게 뛰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내 안의 문이 열렸다. 두려움을 모르는 시작은 순조로웠다. 깊은 속을 내보이려면 용기와 기술이 필요한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나를 드러냄으로서 느낀 한순간의 환희는 충격이었다. 더 이상 벗지 못하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를 기다리는 일로 고통은 새로이 시작되었다. 

  고백적 은유의 말만이 그를 움직일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아직 은유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 차갑지 못한 머리와 뜨겁지도 못한 가슴으로 토해내는 내 말들은 진부와 통속에 절어있다.

  뼛속까지 내려가야 찾을 수 있는 직립의 언어는 부실한 살들을 헤치고 희디흰 뼈로 통하는 길 위에 있다. 길은 아득하고 내 가면의 숫자는 시간과 함께 늘어만 간다. 얼마나 더 아는 척하고, 가진 척하며 너그러운 척하며 가면을 쓸 수 있을까. 눈 밝은 이에게 들키기 전에 스스로 벗어야 하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대해서도.

  나의 절대언어는 그를 만난 짧은 순간의 환희에 머물러 있다.

  머리의 요구를 자주 무시하는 내 몸은 그의 손길이 새겨져 다른 즐거움을 거부한다. 모든 소리와 향내는 그를 통해서만 내게 들어온다. 그에게로 향한 안테나는 지치지도 못하고 분주하다. 이성의 제어장치가 기능을 버린지 오래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나는 쓰려고 하는가. 더 벗으라고, 계속 벗으라고 내밀한 요구만 하는데…….

  좀 더 일찍, 좀 더 많이 뻔뻔해지는 법을 익혀야했다.

  실없이 숨찬 일상에서 내려서는 날, 비로소 언어의 갈망에서 벗어날 것이다.

  내게서 떠난 여물지 못한 말들이 불쌍하다. 그 중심에 들지도 못하고 늘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내가 불쌍하다. 전혀 불쌍하게 보이지 않은 내가, 더욱 불쌍하다.

  나에게도 언젠가 찾아올 절명의 언어를 기다리리라. 이별, 혹은 사랑 그 진부함 속에서도 영원히 빛날 언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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