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계율 : 늙지 말 것

칠부능선 2006. 3. 28. 22:57
 

계율 : 늙지 말 것      

  

                                                         

  마구 뭉쳐 놓은 숱 없는 머리

  오래 전에 생각을 놓아 버린 듯

  쾡한 눈 그늘진 뺨 말은 마르고

  가는 목에 튀어나온 힘줄 완강하다.

  우물처럼 패인 쇄골에 고인 시름

  노동을 기억하는 누추한 어깨

  간신히 매달린 팔 위태롭다.

  늘어져 말라붙은 젖가슴 아직 비릿한데 

  앙상한 다리 사이 무시로 흐르는

  부르지 못한 여인의 이름, 검붉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전을 보는데「한때 아름다웠던 투구공의 아내」라는 제목이 발길을 잡는다. 자신의 이름도 없이 늙어서도 투구공의 아내이기만 한 여인. 로댕은 이 작품의 제목을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전한다. 차라리 늙은 여인 누구라든가 말라버린 우물이라는 제목이 나을 듯 한데 끝내 그는 여인에게 이름 붙여주기를 포기했다. 아름다웠다는 기억이 지금 이 여인의 고단한 생을 지탱하는데 얼마나 위안이 될까. 아름다움의 흔적은 어느 곳에도 없고, 그의 추억 속에만 있다.

  딸은 '커가면서 엄마 닮는다'는 말에 불만이 많다. 그렇게 말하는 친구들에게 '차라리 나를 때려라'고 한다. 엄마보다 자신이 엄청 예쁘다고 생각하는 딸을 대견하게 여겨야 할지 엄마의 모습을 무시한 언사를 괘씸하게 여겨야할지 아직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시대에 따라 그 기준이 변하므로 자신감이 기여하는 부분이 크다. 객관적인 미에서 부족한 부분도 개성으로 여기고 가꾸는 자신감이 있으면 그것이 자기만의 아름다움이다. 젊음에 자신감까지 더한 딸을 보면 객관적 관점이란 별 의미가 없는 듯하다.


  얼마 전 희수喜壽연에서 본 친구의 어머니는 20년 전 모습 그대로다. 눈가에 주름을 없애고, 처진 눈꺼풀은 잘라서 올리고 허물어진 볼에는 보톡스를 주사해 팽팽하다. 세월의 흔적인 잡티나 저승꽃이라는 검버섯을 없애는 것은 기초단계다. 이대로 몇 년이 지나면 잘 가꾸지 않는 친구보다도 젊게 보일 듯하다. 왠지 어색하게 느끼는 건 이전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늙고 힘없는 어머니를 보는 것 보다 마음이 가벼워서 좋다. 

  경로우대는 받는 사람이나 해야 하는 사람이 부담스러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시대가 변한다 해도 젊은 마음과 건강한 몸을 가꾸는 노년은 아름답다.

  예전에는 외적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것은 주체성이 의심스러운 내적 결핍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여유 있는 마음과 경제력의 행사로 비쳐지는 것을 보면 넉넉해진 내 연륜의 덕이리라.


  엘리에트 아베카시스의 소설「쿰란」에서는 기독교 수행자가 지켜야 할 덕목으로 ‘늙는 것은 금지’라는 말이 나온다. 1947년 이스라엘의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구약성서 사본을 기초한 이 육필 두루마리에 의하면 신실한 수행자들에게는 늙음도 타파해야할 대상이다. 신성한 정신을 통해 재생되는 기억으로 나이와 시간, 인간의 쇠퇴를 나타내는 모든 흔적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는다. 순수한 내면세계를 지키면 정신의 청정함이 육체의 늙음까지도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이 에세네파의 사해문서에 나오는 계율이다.

  이 계율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름답다는 말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이 찬사로 들리면 늙은 것이라고 했다. 늙음은 새로움에 대한 에너지를 잃었을 때 온다. 몸이 늙기도 전에 호기심이나 긴장감, 정의감을 잃은 사람은 이미 노인이다. 새로운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열린 사고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푸르게 기억된다.

  남자의 늙음은 마음에서 오고, 여자의 늙음은 얼굴에서 온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보다 짊어진 짐의 무게가 큰 탓이다. 남편이 하는 노후준비를 보며 실감한다. 자신의 사후까지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을 보면 그 짐의 무게를 어찌 가늠하겠는가.

  속없는 나는 용감하다. 내 사후의 걱정 같은 것은 꿈에도 없고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 자주 듣는, 편안한 얼굴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라는 말이 주는 친근감으로 아름다움과 거리가 있다 해도 기쁘게 받는다. 

  모두에게 약속된 길 ―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늙음은 지나야 할 하나의 과정이다. 늙음 없이 맞는 죽음은 얼마나 황당하고 참혹한가.

  머지않아 열정과 호기심, 용기 같은 것이 내게서 멀어지고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 것이다. 눈이 흐려지고, 무릎이 시려오는 시간이 잦아질수록 몸보다 마음이 더 스산해지리라.

  누구의 무엇이었던 것 보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한때 아름다웠던 늙은 투구공의 아내처럼 늙어갈 육신, 계율을 탐하는 욕망을 접는다.

  껍질의 늙음을 순하게 받으며 안으로 들끓던 갈증 깊은 잠재우고, 언제든 조촐하게 이울고 싶다.

  마음이 먼저 늙은 그대, 얼굴로 늙음을 느끼는 그대는 이 계율을 어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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