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귀에게 바침

칠부능선 2006. 3. 28. 23:12
 

         귀에게 바침


 

                                                                                                                                      

  첫인사를 갔다.

  이마는 드러내고 긴머리는 웨이브를 주어 늘어뜨렸다. 둥근 얼굴이 갸름해 보이라고 볼의 절반쯤 가렸다. 식사를 마친 그의 어머니는 다가앉으라고 하더니 가려진 머리를 제치고 귀를 드러내 본다. 이리 저리 보다가 성이 안 차는지 만져보기까지 한다. 굳은 입에 힘이 약간 들어가더니

  “앞으로는 귀를 내놓고 다니거라" 하셨다.


  부처나 신선, 옛날 왕후장상들을 그린 그림을 보면 귀가 크며 귓불이 두둑하고 아래로 늘어져 있다. 그 시대엔 귀가 크고 귓불이 늘어진 것을 복이 많고 잘생긴 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건강면에서 볼 때는 좋은 귀가 아니라고 한다. 한의학에서는 신(腎)이 멀리 듣는 것을 주관한다고 본다. 귀의 모양에 따라서 신장의 건강상태가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귀의 위치는 하악골 앞에 단정하게 붙어 있어야 신장의 모양 또한 단정하고 건강하다고 한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고 올라붙지도 내려앉지도 않은, 그저 그렇게 생긴 내 귀는 어른의 눈을 일단 통과한 셈이다.


  연로하신 친구의 아버지가 가는귀가 먹었다는 말에 온 가족은 장기전(長期戰)의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농을 들었다. 어쩌면 가는귀가 먹으면 장수한다는 옛말은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귀의 기능은 청각을 수용하는 것과 평형감각을 관장하는 것이다. 소리를 귓바퀴에 모아서 고막을 지나고 청소골을 거쳐 달팽이관으로 들어간다. 실제 달팽이와 흡사한 그곳에 있는 청세포의 활동을 청신경이 화답을 하면 대뇌에 전해진다. 비로소 우리는 소리로 인식을 한다. 그 긴 경로 중에 작은 이상이라도 생기면 바로 평형감각을 잃는다. 귀의 임무 중에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평형감각이다.

 시인은 귀의 위험성을 예고했다.


  ' 귀를 찢는 아이 울음소리로

  첨단 무기를 만드는 걸 보면

  귀는 눈보다 덜 위험하지 않다.

  지나가는 말 한 마디에 제 목숨 끊을 수도 있으니,

  귀는 위험할 수 밖에.

  스스로 열고 닫을 수 없으니,

  귀는 더 위험할 수 밖에. '


                                    이성복의 「귀는 위험할 수 밖에」중에서


  내게 소통의 관문이 되어준 귀, 밖으로 향한 통로를 늘 활짝 열어둔다. 잔잔하게 깔리는 선율 혹은 거세게 휘몰아치는 음악은 언제나 즐겁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연골로 이루어진 귀는 포용력도 넉넉하다. 가슴에 담을 말과 흘려도 좋은 말을 가리는 것, 한쪽 귀로 들은 것을 다른 귀로 흘려버릴 수 있는 것도 귀의 미덕이다. 지혜에 눈뜨는 것도 귀의 일이다.

  귀는 품이 넓다.

  뻔한 거짓말이 섞여도 용서할 수 있는 달콤한 속삭임, 가볍게 간질이는 귀엣말도 좋다. 거친 숨소리가 귓바퀴에 구르고 뜨거운 입김이 귓불에 스칠 때 귀는, 몸의 문을 여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좋아하는 마음은 귀의 순종에서 시작한다. 귀가 자유로울 때 감성이 열린다.

  감성에 후한 귀가 이성의 기능에는 인색하다.

  상생(常生)은 겉치레뿐이고, 이견(異見)을 용납하는 귀는 여전히 닫혀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평형감각을 포기한지 오래된 듯하다.

  남과 북으로 나뉘더니 좌와 우로 나누고, 동과 서로 나뉘더니 진보와 보수로 나누고, 더 깊은 골은 신세대와 구세대로 또 나뉘어서 듣는 귀는 봉쇄하고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같은 소리만 반복한다. 이곳에서는 평형감각을 잃지 않은 사람은 회색분자로 몰린다.

  어제를 잊고 사는 사람들 틈에서 오늘도 나는, 어제를 내일의 거울로 삼는다.

  아들도 언젠가 여자를 데려올 것이다. 나도 어쩌면 그녀의 귀를 이리저리 살피며 탐색할지도 모른다.

  “귀가 참 예쁘구나.”

  후하게 말하는 법을 먼저 익힌다.


'수필. 시 -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이상 무섭지않다  (0) 2006.06.12
선 채로 꾸는 꿈  (0) 2006.03.28
계율 : 늙지 말 것  (0) 2006.03.28
비로소 선언함  (0) 2006.03.28
불쌍한 여자  (0) 2006.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