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600

히키코모리

나는 히키코모리 - 김 민 크리스털 컵에는 빙하기 마지막 별 한 모금 * 오랜만에 호수를 바라보며 낮술을 마셨다. 파문이 끊이지 않는 호수를 보며, 흔들리는 것들만 먹고 산다는 를 떠올렸다. 오늘의 화두는 였다. 나는 바람에게 그대를 평온하게 해 주라고 명한다. 누군가에게 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것은 작가적 소양이 다분하다는 말과 같다고 해석하는 것은 나만의 관점일까. Idir & Karen Matheson - A Vava Inouva 2

놀자, 책이랑 2010.04.29

'서툰 사랑의 고백'

'내가 국어의 혼탁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불순함의 옹호자이기 때문이다. 불순함을 옹호한다는 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의 단색 취향, 유니폼 취향을 혐오한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영 다르게 생겨먹은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토박이말과 한자어와 유럽계 어휘가 마구 섞인 혼탁한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쉰다. 나는 한문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 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낀다. 순수한 토박이말과 토박이 문체로 이루어진 한국어 속에서라면 나는 질식할 것 같다. 언어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의 혐오, 북벌北伐, 정왜征倭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

놀자, 책이랑 2010.02.22

남자들에게 / 시오노 나나미

남자들에게 - 시오노 나나미 남편이든 애인이든 사랑하는 사람이 한번 병이 나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지 않아 본 여자는 여자도 아니다. 하지만 진짜 병이어서는 곤란하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병으로는 이야기가 심각해지니 정말로 바라서는 안되겠지. 감기나 골절쯤으로 해두자. 왜 병이 나 주었으면 하느냐 하면, 병이 나서 침대에서 일어나 앉지 못할 상태가 되어야 겨우 여자는 남자를 독점할 수 있으니까. 남자란 요상한 동물로 능력 있는 남자란 것과 바쁘다라는 것을 정비례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바쁘면 바쁠수록 자기가 무슨 ‘대단한’ 남자인 줄 알고, 또 그런 모습을 여자에게 과시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런 남자들은 시간을 내는 것이야말로, 특히 사랑하는..

놀자, 책이랑 2010.01.29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 / 김훈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 ― 김 훈 전군가도/사이판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 어느 해 4월 벚꽃 핀 전군가도全郡街道 (전주-군산 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다가, 꽃잎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둥치 밑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나는 내 열려지는 관능에 진저리를 치면서 길가 나무둥치에 기대앉아 있었다. 나는 내 몸을 아주 작게 옹크리고 쩔쩔매었다. 온 천지에 꽃잎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무둥치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바라보면, 만경 평야의 넓은 들판과 집들과 인간의 수고로운 노동이 쏟아져 내리는 꽃잎 사이로 점점이 흩어져 아득히 소멸되어 가고, 삶과 세계의 윤곽은 흔들리면서 풀어지면서, 박모의 산등성이처럼 지워져 가는 것이었는데, 세상의 흔적들이 지워..

놀자, 책이랑 2010.01.29

제기(題記) / 루쉰

제기(題記) - 루쉰 여기 형식이 전혀 다른 것들을 모아서 한 권의 책 모양으로 만든 연유를 말하자면 아주 그럴사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거의 20년 전에 쓴 이른바 글 몇 편을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쓴 것이란 말인가? 나는 생각했다. 읽어 보니 틀림없이 내가 쓴 것이었다. 그것은 『하남(河南)』에 보냈던 원고였다. 그 잡지의 편집 선생은 이상한 기질이 있어 글은 길어야만 했고, 길수록 원고료는 더 많았다. 그래서 「마라시력설(摩羅詩視力設)과 같은 것은 그야말로 억지로 긁어 모은 것이다. 요 몇 년 사이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괴이한 자구를 짓고 옛 글자를 쓰기를 좋아했으니, 이는 당시 『민보(民報))』의 영향을 받았다. 지금 조판인쇄의 편리를 위해 조금 고쳐 놓..

놀자, 책이랑 2010.01.06

간디의 물레 / 김종철

간디의 물레 -김종철 무슨 까닭인지 그동안 수입이 금지되었다가 최근 국내에서도 볼 수 있게 된 영화 중에 가 있다. 이 영화 자체는 보는 각도에 따라 미흡한 작품인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간디의 반식민주의투쟁의 비교적 충실한 연대기가 작성되어 있음을 보지만, 간디라는 한 위대한 영혼과 그 영혼의 모태인 인도 민중의 근원적인 심성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깊이있게 들여다보는 시선을 느끼지는 못한다. 이것은 헐리우드영화의 피할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사회교육적 가치는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파괴와 억압의 시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오늘이 상황에서 비폭력의 이념을 고수했던 한 고귀한 인간에 마주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뜻깊은 경험이다. 더구나 이 영..

놀자, 책이랑 2010.01.01

저녁노을 / 슈테판 헤름린

저녁노을 - 슈테판 헤름린 1 진정 즐겁게 산보하고자 하는 이들은 태양을 마주보고 간다고 오린 노래했다. 우리가 인(Inn)강 다리를 건널 때 태양은 동쪽 산등성이에 맞닿아 있었다. 넓고 끝없이 긴 계곡의 가운데께에 있는 다리 위에서 나는 선생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한 순간 마냥 정지해 있었다. 빠르게 흐르는, 회색빛이 감도는 초록색 강물 바닥에서 나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송어떼를 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계곡이 끝나는 저 멀리 남쪽의 산을 쳐다 보았고, 그 산을 나는 나의 산이라고 불렀으며, 영원히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 라 마르냐. 그리고 그 높이 있던 하늘, 그건 얼마나 아득하였던가. 그때 그 하늘이 어쩌면 그토록 고요할 수가 있었는지, 아직도 구름이 엉켜질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

놀자, 책이랑 2009.12.28

은유로서의 질병 /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 수전 손택 고대 세계를 관찰하다 보면, 흔히 질병이 신의 분노를 보여주는 도구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의 심판은 특정 공동체에게 향해질 수도 있었고, (『일리아드』의 제 1권을 보면, 아가멤논이 크리세스의 딸을 유괴한 테 대한 징벌로서 아폴론은 그리스 군이 역겹에 걸리게 만든다. 『외디푸스』에서는 죄를 범한 외디푸스 대왕의 존재 자체가 신성을 모둑하는 일이었기에 테베에 역병이 돈다) …… 정신은 육체를 배반하는 법이다. 1917년 9월,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결핵에 관해 이렇게 언급했다. “내가 미처 알기도 전에, 내 머리와 폐가 뭔가 합의를 한 것 같다네.” 다시 말하자면, 한 사람의 육체가 자신의 감정을 배반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말년의 만이..

놀자, 책이랑 2009.12.24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언제 겨울이 왔을까? 계절은 사람이 늙는 것처럼 서서히 쇠퇴해갔다. 하루하루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어느새 겨울은 가혹한 현실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저녁에 기온이 좀 내려가는가 싶더니, 며칠 계속 비가 오고, 대서양에서 온 바람이 제멋대로 불고, 습도가 높아지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결국 서머타임으로 당겼던 시간을 다시 늦추게 되었다. 그래도 이따금씩 유예의 순간들이 있었다. 외투 없이 집을 나서다 구름 한 점 없이 밝게 빛나는 하늘을 볼 수 있는 아침이 그런 때였다. 그러나 이런 아침은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환자가 보여주는 거짓 회복 징후와 같았다. 12월이 되자 새로운 계절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거의 매일 불길한 느낌을 주는 강철빛 회색 하늘이 도시를 덮..

놀자, 책이랑 2009.12.16

외면일기 / 미셸 투르니에

외면일기 - 미셸 투르니에 *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의 여정과 그때그때 있었던 일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날씨, 철따라 변하는 우리 집 정원의 모습,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 운명의 모진 타격, 흐뭇한 충격 따위를 노트에 적어두는 습관이 있었다. ‘일기’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것은 ‘내면의 일기’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외면일기’라는 이름을 만들어 붙여보기로 한다. …… 나는 나의 창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설 때 비로소 영감을 얻는다. 현실은 나의 상상력의 밑천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어서 끊임없이 내게 경이와 찬미를 자아낸다. - 중에서 * 매년 1월 초에는 프랑크푸르트 근처, 노이-이젠부르그의 동부, 호이젠슈탐에 있는 중학교 체육관에서 기이한 축제가 ..

놀자, 책이랑 2009.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