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사람이랑

[스크랩] 시인세계, 2005 봄호 특집, 시인과 술

칠부능선 2007. 1. 30. 09:11

시인세계, 2005 봄호 특집

 

<시인과 술>


'시인과 술'이라는 말을 들으면 왜 '바늘과 실'의 관계가 연상될까? 코뚜레를 한 소가 척박한 밭을 가는 것처럼 제 코에 실을 꿰어 달고 옷감 위에 온몸을 던지는 바늘은 언어의 밭을 갈고 재봉하는 시인의 모습과 같다. 크고 힘센 소를 잘 부릴 수 있게 하는 쇠코뚜레나, 옷감 위를 누비는 바늘처럼 술은 피폐한 일상에 굴하지 않고 꼿꼿이 고개 세운 시인을 시적 영감과 도취의 세계로 이끈다.

그래서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예술가들은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는 보들레르의 주정섞인 말에 실없이도(?) 공감한다. 또는 공감했었다. "요즈음 한국 시단엔 젊은 디오니소스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단정한 아폴론의 몽상과 함께 시에 대한, 삶에 대한 열정적인 도취를 다시 보고 싶다.

<시인세계>의 이번 특집은 시인들의 낭만적 도취와 시적 열정에 대한 그리움이자, '행복한 시쓰기'를 가능케 했던 하얀 마법에 대한 새로운 주문이 될 것이다.

 

술은 시와 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장    석    주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다. 우리는 한 잔의 술을 마시며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는 소녀와 문학과 인생, 그리고 세월은 가고 오는 것임을 이야기한다(박인환, 「목마와 숙녀」). 술은 연애와 정치의 촉매제이자 풍요한 사교생활을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아울러 예술가에겐 삶의 진부한 조건들에 대항하는 영감과 힘의 원천이다. 그러니 아리스토파네스가 마시고, 소크라테스가 마신 그 술을 나도 마시는 것이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스물 몇 해 동안 내 몸을 통과해 간 술의 종류며 양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삼십대에는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술을 마신 적도 있다. 액체화된 불이 위장 속으로 들어가 혈관으로 흡수되면 도취라는 현상을 일으킨다. 빈속에 술을 마시면 급격하게 취한다. 갑자기 말이 없던 사람이 다변이 되고, 수줍어하던 사람도 언제 그랬냐 싶게 용기를 넘어서서 만용에 가까운 행동을 드러내 보인다. 술자리는 활기가 넘치고 과장된 친밀감과 호언장담豪言壯談, 의기투합, 그리고 속내를 거침없이 털어 내놓는 화기애애한 의전儀典의 자리가 된다. 사업상의 중요한 결정이 공적인 자리에서가 아니라 술자리에서 쉽게 이루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문명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액체의 종류는 술과 커피일 것이다.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실까? 물론 기분 좋게 취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왜 커피를 마실까? 각성과 기분전환을 위해서다. 알코올은 “비이성적인 것들의 해방자”고, 카페인은 “이성적인 것들의 선동자”다. 인간의 영혼은 이 두 극단을 다 갈망한다. 알코올과 카페인은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약물이다. 카페인은 차, 커피, 코코아, 초콜릿, 각종 청량음료, 비처방 약물에 두루 들어 있다. 미국 성인의 80퍼센트가 매일 카페인을 섭취한다. 물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마시는 것들 거의 모든 것에 카페인이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그 다음은 알코올이다.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신다. 술에 취하면 주사도 부리고 얌전하던 사람들도 평소와 다른 말과 행동을 해서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고 실망시키기도 한다. 알코올에 영향을 받은 뇌의 신경전달물질의 장난으로 신중한 욕망들과 충돌하거나 철저하게 제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소동이다. 술을 많이 마시면 두통, 구토, 숙취, 그리고 중독의 위험성은 높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의 소비량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지구 위의 사람들이 여전히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는 것이다. 그 결과 카페인과 함께 알코올이 현대인이 가장 애용하는 약물이 되었다.


어느 사회에서건 술과 관련된 일화를 가장 많이 남기는 사람들은 예술가들이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많은 시인들은 술이 주는 도취와 번개처럼 내려주는 인공낙원에서 시적 영감을 구했다. 보들레르가 『파리의 우울』이라는 시집에 새겨 넣은 “끊임없이 취해야 한다. 무엇에? 술이건 시건 덕성이건 그대 좋을 대로 취해야 한다.”라는 구절은 이제 너무나 유명해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작가나 시인, 혹은 화가들이 술에서 구한 것은 도취상태, 황홀경, 의식의 해방이다. 상습적 음주든지 간헐성 음주든지 간에 예술가들은 술에게서 젊음과 열정, 쾌활한 낙천주의, 섬광같이 번쩍이며 내려오는 영감을 구한다.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 제임스 조이스, 스콧 피츠제럴드, 딜런 토마스 같은 이들은 정도가 지나치게 술에 탐닉했다. 우리 문학사에서도 변영로나 조지훈, 고은, 김관식, 김종삼, 천상병, 조태일, 박정만과 같은 시와 술에서 다함께 일가를 이룬 시인들이 있다.

 

고은은 요즘 시인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일갈하며 이성의 투명함만으로 시를 견인해 가는 것의 한계와 위기에 대해 말한 바 있지만, 여전히 젊은 시인들은 술을 많이 마신다. 김영승이나 함민복, 정병근, 혹은 이윤학 같은 시인들은 “끊임없이 취해야 한다”는 보들레르적 교양의 추종자들이다. 술은 그들의 눌린 감각과 관념을 펴주고 식은 기쁨을 뜨겁게 데워 주고 육체와 문체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젊은 시인들에게 폭음은 때묻은 삶에 대한 정화의 의식이며, 권태와 허무에 피를 빨린 창백한 영혼에게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치료의 제의로 정당화된다. 이처럼 술과 시인, 술과 예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둘은 서로를 부양하며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계속 확장한다. 그래서 알렉상드르 라크루아는 “술은 어쩌면 보들레르 이후 문학의 혁신에 가장 크게 기여한 동인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른다”고 했을 것이다.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이
아무리 일들로 가득 차 덜그럭거린다 해도
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거룩하다
우리는 그대의 빈 그릇을
무엇으로든 채워야 하느니,
우리가 죽음으로 그대를 배부르게 할 때까지
죽음이 혹은 그대를 더 배고프게 할 때까지
신성한 시간이여
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
나는 오늘 낮의 고비를 넘어가다가
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을 보았다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
시간이여,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그대,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메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뼁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  정현종, 「낮술」

 

정현종의 초기 여러 시편들은 취기로 인해 번쩍이는 기쁨을 노래한다. “자기의 색채色彩에 취해 물방울들은 / 연애戀愛와 무모無謀에 취해 / 알코올에, 피의 속도에 / 어리석음과 시간에 취해 물방울들은 떠 있는 것인가”(「무지개 나라의 물방울」), “쓰레기는 가장 낮은 데서 취해 있고 / 별들은 천공天空에서 취해 있으며”(「기억제 1」), “우리는 늘 안 보이는 것에 미쳐 / 병病을 따라가고 있었고”(「술 노래」), “모든 사물의 붉은 입술이 그대를 부르고 있다 / 가장 작은 것들 속에도 들어가고 싶은 치정癡情 / 들어가고 싶은 공기, 물, 철鐵, 여자……”(「신생新生」)와 같은 시구들은 취기가 일으키는 열락과 존재의 고양감에 대한 찬미를 담고 있다. 취기는 진부한 일상에 대한 눈부신 반역이다. ‘낮술’은 소름끼치는 일상의 권태와 무의미에 대한 모반이며 도발이다. 당연히 술을 마시면 취한다. 취한 자의 발걸음은 갈짓자로 흐트러지며 혀는 꼬여 제대로 된 발음을 할 수가 없다. 술이 불러오는 것은 취기, 혹은 명정酩酊이라고 부르는 것. 취기는 무엇보다도 쾌락이다. 그 쾌락은 딱딱하고 꽉 짜여진 일상에서의 책임과 의무로부터의 해방감에서 비롯된다. 명정의 눈부심 속에서 불투명한 것들은 자명해지고 혼란스러웠던 것들은 질서를 되찾는다. 자명한 일상성이란 가면을 벗고 존재의 갱신을 이룩한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은 빛난다. 술에 취했을 때 얼굴은 마치 꼭대기에 걸린 깃발과 같이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낀다. 고조된 감정이 낳는 것은 절제에 대한 태만이다. 그리하여 술로 인해 열정과 관능으로 고조된 영혼은 거침없이 인공낙원이라는 정점을 향하여 치닫는다.


채호기에 의하면 술은 입을 가진 액체다. “입술은 술의 입. 입을 가진 액체는 술밖에 없다. 술은 빨아들인다. 술 마시는 사람은 술 안으로 사라지고 만다. 몸 안으로 들어간 술은 모두 몸 밖으로 입만 내민다. 붉은 입술로 치장하고 있는 취한 사람의 몸.”(채호기, 「너의 입술」)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거꾸로 술도 술 마시는 사람을 마신다. 그러니까 술 마시는 사람이 술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채호기는 이 대목에서 절묘한 표현을 하나 꺼내 놓는다. “몸 안으로 들어간 술은 모두 몸 밖으로 입만 내민다.” 취기의 관능이 타자를 향한 육체의 욕망으로 그토록 쉽게 바뀌는 것도 그 때문이다. 취기와 에로티시즘은 둘 다 무상의 유희라는 점에서 근친적 관계다. 술을 마시는 것은 섹스의 대체행위이기도 하다. 취기가 불러오는 관능과 성적 관능은 자주 하나로 겹쳐진다. 둘 이상의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는 것, 만취상태에 빠져드는 것은 육체의 모험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인습과 도덕이 억제하는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사내들이 의기투합해서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은 섹스의 이상적 승화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莊嚴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가는데
할머니 등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   천상병, 「주막(酒幕)에서」

 

음주자들은 취한 상태에서도 계속 술을 찾는다. 그들이 자의로 술 마시기를 그치는 법은 없다. 그것은 명정에서 빚어지는 쾌락의 현재, 무감각해진 현재를 한없이 연장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술을 평생의 동반자로 선택한 천상병은 명정의 상태에서 “할머니의 등 뒤에 / 고향의 뒷산이 솟고 / 그 산에는 /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본다. 이른바 환각 체험이다. 시인은 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즐겁게 노니는 고향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莊嚴하다”는 구절은 술이 삶과 세계를 따뜻하고 숭고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묘약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어쩌면 술이 없었다면 이 세상의 가장 천진한 술꾼의 외관을 하고 제 안에서 세상을 추방해 버린 천상병의 천진무구한 시세계도 그다지 풍요롭지 못했을 것이다. 천상병은 비현실적 행복을 도취의 순간으로나마 누리게 하는 술이 있었기에 이 구질구질하고 악마적이며 진부한 세계조차 ‘선경仙境’으로 바라보게 하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귀천」)와 같은 대긍정과 화해가 가능했을 것이다. 술이 없었다면 김관식의 좌충우돌의 미학이나, 김종삼의 청결한 금욕적 탐미주의, 조태일의 남성적 서사의 시세계가 과연 가능했을까. 술은 쾌락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예술의 창조를 위한 자양분이다.


알코올은 단순한 뇌신경 억제 물질도 아니고 흥분 물질도 아니다. 알코올은 뇌의 어떤 회로, 어떤 체계도 내버려두지 않는 광범위한 흥분제, 억제제인 동시에 기분전환 물질이다. 알코올은 코카인, 암페타민, 밸리엄, 아편과 같은 약물 작용을 흉내낸다. 코카인이나 암페타민과 같이 뇌체계의 전기적 활동을 증가시켜 기쁨과 행복, 혹은 존재의 고양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은 이것에 현혹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술에 취했을 때 신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박탈, 혹은 중심 상실이다. 이성의 통제라는 빗장이 풀려버리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이성의 발 아래로 심연을 여는 것”이다. 술 취한 자는 잘못된 길로 들어선 신, 실수하는 부처이다. 평소에 하지 않던 돌출행동과 실수를 연발하고, 즉흥성, 허장성세, 큰소리와 같은 행동양태를 보이는데, 이는 일종의 최면상태라고 할 수 있다. 술은 내면 속에 잠들어 있던 괴물의 영혼을 깨운다. 술자리에서 그토록 많은 소동들이 벌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미세한 불씨를 되살리려 안간힘을 쓴다
대부분의 추진력을 상실해 버린 몸속,
차곡차곡 검은 잿더미로 채워지고
몇 점의 불씨들만 간신히 여분의 시간을 지탱한다
쉴새없이 알코올을 채운다
이 별은 너무 추워, 잠시만 방심하면
손발이 떨리고 생각들이 얼어붙는다
태엽 인형처럼 덜덜거리며 상식적인 기침소리만 튀어나온다
한 모금의 공기에게도 무력해진다
비로소 온몸 가득 연료가 채워진다
서서히 불꽃이 피고
눈동자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불빛이 환하다
그를 둘러싼 어둠이 녹아 흐른다
환각의 그림이 출렁이고 고향의 방언이 쏟아진다
이 생에는 없는 말들 기억들
한꺼번에 출렁인다 찔끔찔끔 넘쳐흐른다
불이 기우뚱거린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고통과 두려움의 질서를 숭배하는 도시로부터
그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인 듯 서둘러 추방당한다
늙은 유령처럼 떠돌며 삶을 비워낸다
빈 밥그릇 같은 공터에서 하루를 게워내고
몇 점 남은 불씨를 껴안고 웅크린다


――  배용제, 「알코올 중독자」

 

상습적 음주는 완만한 자살행위이다. 상시적 술 마시기는 권총이나 단식, 마약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자기파괴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사는 시간은 건강한 보통 사람의 시간과 다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무감각해진 현재 속에 사는 것”이며, 그들의 발걸음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중독자들에게 “미래는 텅 비었고, 과거는 굳었다.” 배용제에게 술의 기운을 빌리지 않은 채 바라보는 현실이란 “손발이 떨리고 생각들이 얼어붙는” 냉기로 가득찬 세계다. 냉기로 가득 찬 세계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 불과 불씨를 지피는 일이다. 술에 의해 불이 지펴질 때 비로소 환각의 그림, 고향의 방언, 그리고 “이 생에는 없는 말들,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게 술이 인간에게 베푸는 황홀경이다. 이 황홀경에서 깨어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냉기로 가득 찬 세계에서 늙은 유령처럼 떠도는 삶과 마주친다. 알코올 중독자는 끝없이 술에 취해 있음으로 해서 현실과 대면하는 순간을 한없이 유예시키는 사람이다. 술의 위안과 환각은 예술이 인간에게 베푸는 지복과 닮아 있다. 그러나, 술은 인공낙원으로 가는 위조된 차표에 지나지 않는다. 알코올 중독자는 쾌락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을 때 필연적으로 추락한다.


시인 박정만은 죽기 서너 달 전부터 곡기를 끊고 하루도 쉬지 않고 소주를 마셨다. 술의 명정 상태에서 깨고 나면 몸도 마음도 괴로우니까, 다시 취하기 위해 몸 속에 소주를 들이부었다. 그는 명정 상태에서 수백 편의 시를 쏟아냈다. 그가 스무 해 동안 썼던 시보다 죽기 직전의 두세 달 동안 썼던 시의 양이 더 많았다. 박정만은 취기에서 취기로 이어지는 황홀경 속에서 시의 영감을 구하고, 접신接神의 경지에서 폭발적으로 시를 쏟아냈다. 그는 시의 끝머리에 시를 쓴 날짜와 시간을 적어 넣었는데, 어떤 시들은 불과 일이 분의 간격을 두고 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괴로웠겠지만, 아마도 영혼의 마지막 불꽃을 소진시켜가며 시를 한 편 한 편 토해낸 그 자신은 누구보다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장석주  충남 논산에서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과,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시인·작가·평론가로 문단 활동 시작. 시집으로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갖고 있다』 등과 소설 및 평론집 다수가 있음.

 

 

시인과 술에 얽힌 이야기들
정    규    웅

 

우리 문단에서 누구보다 술을 사랑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고은 시인이 얼마 전 어느 시 잡지에 이런 글을 쓴 일이 있다.
“이제 시인들 가운데 술꾼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막말로 최근의 시가 가슴에서 터져 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고 시인은 뒤이어 어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도 했다.
“마시면 행복하고 깨어날 때의 황폐함, 그 황폐함에 대한 자기 회한과 환멸, 연민, 허무와 함께 하기 위해 마시고 또 마셨다. 그렇게 내 시는 씌어졌다. 나는 시인에게 깨어 있기보다 취해 있기를 권하고 싶다. 취기와 광기를 저버리는 것은 시인에게는 죽음이다.”
이 땅의 수많은 시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시인이 이 말에 공감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인들 가운데 술꾼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1970년대의 한 시대를 돌이켜보면 분명해진다. 통계를 내기는 어렵지만 1970년대는 아마도 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땅의 문인들이 가장 술을 많이 마신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1970년대와 문인, 그리고 술을 이야기하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청진동을 중심으로 한 종로 일대다. 해질녘 일을 마치고 그쪽 동네로 가서 어슬렁거리면 어떤 술집에서나 문인들을 만나도록 되어 있었다. 1970년대의 10년을 일선 문학기자로 일한 나에게 청진동은 가장 중요한 ‘출입처’였다. 취재원이자 후에 술친구가 된 대다수의 문인들을 그곳에서 만났으니까.
고은 시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분과는 술에 얽힌 일화들도 많이 만들었다. 1970년대 초의 일이었다. 문학기자로서는 아직 ‘올챙이’였고, 그래서 많은 문인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과제이던 때였다. 어느 날 오후 서너시쯤 취재를 마치고 신문사로 돌아가던 중 광화문에서 우연히 고은 시인과 마주쳤다. 고 시인이 무척 반가워해주는 것이 ‘황송’할 지경이었다. 의례적인 인사가 끝난 뒤 고 시인이 ‘돈을 좀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호주머니를 털어보니 두 술꾼이 마음 놓고 술을 마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돈 몇 푼을 손에 들고 난처해하자 고 시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자, 갑시다.”

고 시인은 내 팔을 잡고 청진동 뒷골목의 어느 허름한 술집으로 끌고 갔다. 나는 좀 불안했지만, 고 시인은 호기롭게 찌개 한 냄비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가격표를 보니 이미 내가 가진 돈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소주를 두 병째 비우자 찌개가 바닥났다. 고 시인은 소주를 더 주문하고 나서 주전자의 물을 모두 냄비에 붓더니 상 위에 있는 김치 나물 등 모든 밑반찬을 냄비 속에 쏟아 넣는 것이었다. 다시 찌개냄비를 끓이기 시작하면서 고 시인은 말했다.
“이쯤 되면 안주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술이나 더 시킵시다.”


이렇게 해서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주머니가 가볍던 시절이니 꽤 효과적인 방법이어서 술집 주인에게는 미안했지만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이 방법을 써먹었다.목탁 대신 바가지를 젓가락으로 두드리면서 불경을 외는 고은 시인의 ‘파격적’인 모습을 본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어느 날 청진동에서 고은 시인과 황동규, 김현 등 몇몇 문인들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옆자리의 어떤 문인으로부터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모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리 일행은 고 시인의 제안에 따라 곧 술자리를 걷어치우고 정릉의 박 선생 댁으로 문상을 갔다. 문상을 끝낸 다음 고 시인의 부탁으로 상청에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양푼이 준비됐고, 물 위에는 엎어진 바가지가 놓였다. 고 시인은 젓가락으로 바가지를 두드리며 불경을 외기 시작했다. 고 시인의 표정이 워낙 진지해서 아무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초저녁부터 마신 술이어서 어지간히 취했을 텐데도 고 시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목소리는 청아했다. 평소에 그와 같은 모습을 대할 수 없을 것이고 보면 시인과 술의 미묘한 상관관계를 얼마간 엿볼 수 있을 듯하다.


고은 시인 외에도 청진동과 시인과 술…… 이런 것들을 연관 지어 생각하면 두 시인이 떠오른다. 한 분은 박재삼 시인, 다른 한 분은 박용래 시인이다. 나는 이 두 분을 주로 청진동의 술집에서만 만났는데 얼른 떠오르는 것은 박재삼 시인의 미소, 그리고 박용래 시인의 눈물이다. 본래 웃음과 눈물은 상반된 이미지지만 이 두 분의 경우에는 인간의 본질적 순수성, 그리고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이한 감성이라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한다. 술이라면 무슨 술이든 즐겨 마셨던 박재삼 시인은 술을 마실 때면 언제나 환한 얼굴로 사랑과 추억을 이야기했고, 흘러간 옛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유독 고량주를 즐겼던 박용래 시인은 늘 음미하듯 한 모금씩 들이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이분들의 평생 시업은 술과 무관할 수 없으리라 보이기도 한다.


박재삼 시인은 64세에, 박용래 시인은 50세에 세상을 떠났다. 비교적 젊은 나이였기에 이분들의 죽음을 ‘술 탓’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단순히 ‘술 탓’으로 돌려버리기엔 그분들의 죽음이 너무 아깝다. 물론 술로 인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시인들도 있기는 하다. 술에 취해 귀가하던 중에 고속 질주하던 차량에 떠받혀 목숨을 잃은 김수영 시인과 채광석 시인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것이 단순한 사고였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술 탓’으로 돌려버리고 싶지 않은 것은 그들이 술을 지배했을지언정 술이 그들을 지배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시 술로 인한 불의의 사고였지만 1979년 임홍재 시인의 죽음은 ‘시적詩的’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그로부터 3, 4년 전 그가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하면서부터 그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임 시인은 비슷한 시기에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한 이인해 시인, 정대구 시인과 동인지 《육성》을 내고 있었는데 나와는 형제처럼 지내던 이인해 시인이 동인들이 모일 때면 나를 꼭 그 자리에 끼워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 가을이었던가, 나는 어느 날 이 시인으로부터 임홍재가 죽었다는 충격적인 전화연락을 받았다. 퇴근 후 그의 시신이 안치된 청량리 병원으로 찾아갔다. 동인들이 들려주는 그의 죽음의 모습은 너무나도 시적이었다. 그것은, 술에 취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강물 속에 뛰어들었다가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지는 중국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이백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임 시인은 그 전날 밤 술에 거나하게 취해 노래를 흥얼거리며 청량리의 뚝방길을 걷다가 마치 무엇엔가 홀리기라도 하듯 뚝방 아래로 굴러 떨어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목격자들의 말로는 그 모습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것 같기도 했고, 꽃잎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고 한다.
임홍재는 평소에는 말이 없고 표정에도 변화가 없이 늘 조용한 편이었지만 동인들 가운데서 가장 술을 즐기고 술만 마셨다 하면 열정적으로 변하는 체질이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는 늘 그가 좌중을 주도했다. 시에 대한 정열도 대단해서 술을 마시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면 메모지에다 끄적대는 버릇도 있었다. 그런 기억들이 각인돼 있던 까닭인지 나는 그의 죽음의 모습을 전해 들었을 때, 그가 죽기 직전까지 그의 영혼을 불사를 만한 어떤 ‘시혼’에 휩싸여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했다.


‘술 때문에’ 죽은 시인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두말않고 박정만을 꼽겠지만 만약 박정만이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그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우선 그는 누구보다 술을 사랑했던 시인이었고, 그가 죽기 몇 년 전부터 밥 대신 술로 살게 했던 것은 이 세상이요, 이 사회였기 때문이다. 곧 그는 술의 힘을 빌어 그가 꿈꿨던, 그리고 가고자 했던 영원의 세계로 떠난 것이다. 그가 죽기 얼마 전 썼던 글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단언하거니와 나는 술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가치를 안다. 그것은 누룩으로부터 발효된 술이 인간을 자연화, 식물화하고 하나의 풀잎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때의 그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고 포근한 우리들의 평화, 또는 자유, 또는 사랑.
머지않아 술은 나를 죽음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 이전에도 박정만은 누구보다 술을 사랑하는 시인이었으나, 1981년 5월의 그 끔찍했던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 이후 하루도 술을 떠나서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한두 해 동안 그가 한 일이라고는 술 마시는 일과 시 쓰는 일뿐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인사동에서 그의 마지막 시화전이 열려 마련된 술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님, 사람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직 술만 마시고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고 신기해요. 한데 더욱 이상한 것은 술만 마셨다 하면 시가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이었어요.”


1987년 한 해 동안 박정만은 1천 병 이상의 소주를 마셨다고 했다. 최소한 하루에 3병꼴인 셈이다. 빈 소주병을 치우지 않고 조그마한 마당에 늘어놓으니 그 모습이 ‘장관’이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피크는 아마도 그 해 여름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 기형도가 중앙일보에 쓴 기사를 보면 무더위가 한창이던 20여 일 동안 소주만 1백 병 이상을 마시며 무려 3백여 편의 시를 썼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박정만에게 있어서 술이란 시를 나오게 하는 어떤 묘약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박정만의 술 이야기를 기사로 쓰고, 박정만이 죽은 지 약 5개월 후인 늦겨울의 어느 날 새벽 낙원동의 허름한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기형도 시인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맥주 한 병쯤이 정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형도 역시 술만 마셨다 하면 변화가 빨리 온다. 평소에는 늘 어둡고 쓸쓸하고 어딘가 공허한 표정이지만 술만 들어가면 얼굴이 밝아지고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라고 권하면 서슴없이 뛰어난 솜씨로 노래를 불러제치곤 했다. 남보다 10분의 1의 술을 마시고도 10배의 효과를 낸 셈이었으니 ‘경제적인’ 술꾼이었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역설적으로 말해서 박정만 말년의 좋은 시들은 모두 술의 힘을 빌어 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박정만을 죽게 한 것은 술이 분명하지 않느냐고 입을 모은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술 때문에 죽었다고 보는 시인은 박정만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1960년대 이후만 하더라도 김관식, 조지훈 시인을 비롯해서 천상병, 조태일, 김광협 같은 시인들도 모두 술 때문에 수壽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술의 속성상 술을 마시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주량이 다르고 술버릇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술로 인해서 받는 영향 또한 저마다 다를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똑같은 조건에서 같은 양의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술은 얼마나 자주, 혹은 얼마나 많이 마시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술을 마시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얼마나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느냐가 문제라는 주장도 있다.


일찍이 주성酒聖으로 통하던 조지훈 시인이 술꾼의 단수段數를 바둑처럼 18단계로 나누어 내로라하는 술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급을 매겼던 것도 그 까닭이다. 주량으로 따지면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던 후배 시인 김관식의 뺨을 올려붙이며 겨우 ‘3단’을 부여했던 것도 김 시인의 고약한 술버릇이 주도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술만 마셨다 하면 대선배에게도 ‘군’ ‘자네’의 호칭을 마구 썼던 김 시인도 조 시인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그의 일갈을 경청하고 있었다니, 주량으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주성’을 알아보는 실력만으로도 3단은 좀 약소한 단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조지훈 시인은 낙주종생樂酒終生한 사람, 곧 술을 즐기다가 삶을 마감한 사람에게 최고 단수인 9단을 부여했는데, 시인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직장의 책상 서랍에 항상 술병을 넣어두고 일을 하다가도 수시로 꺼내 마셨던 김광협 시인. 그가 죽었을 때 ‘바커스 주신酒神이 심심해서 불러갔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만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즐겼던 조태일 시인.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돈을 달라고 해 돈을 손에 쥐면 무조건 술집으로 달려가곤 했던 천상병 시인… 만약 조지훈 시인이 생존해 있다면 당연히 이들에게 9단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조태일 시인은 생전에 ‘나는 천상병 시인에게 술을 얻어 마신 유일한 사람’이라고 자랑하곤 했는데 그렇다면 조 시인이 천 시인보다  단수가 높다고 봐야 할는지.


이제까지 언급한 시인들 외에도 시인 가운데서 술꾼을 꼽으려면 얼마든지 더 꼽을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 이래로 시인과 술은 어떤 보이지 않는 끈으로 단단하게 연결돼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 오래 전에 어떤 잡지에서 술을 즐기는 각계 명사들에게 우리 역사상 주선酒仙으로 꼽을 만한 술꾼들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이를 통계로 낸 적이 있었다. 그 결과 10위 안에 든 사람들의 대부분이 시인이었다.


1위가 조선조 중기의 기생 황진이, 2위가 변영로 시인, 3위가 조지훈 시인, 4위가 조선조 말기의 김삿갓, 5위가 조선조 중기의 김시습, 6위가 조선조 중기의 임제, 7위가 소설가 김동리로 모두 시인이거나 시를 썼던 사람들이었다(이밖에 임꺽정, 대원군, 원효대사가 각각 8, 9, 10위를 차지했다). 통계나 순위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겠지만 옛날부터 시인과 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깊이 각인돼 있는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정규웅  1941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저서 『휴게실의 문학』 『오늘의 문학현장』 『글동네 사람들』 등. 소설 『그림자 놀이』 『피의 연대기』 등이 있음.


 

도취의 시학 ― 프랑스 시인을 중심으로
박    철    화

 

디오니소스 신화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역사에서도 술은 아주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그 전통은 문화예술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명징하고 냉철한 의식으로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 아폴론적인 전통에 못지않게, 열정과 영감을 높이 평가하여 제한 없이 자아를 분출하고자 했던 디오니소스적 전통이 서양의 문화예술사를 수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늬는 특히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마치 마법처럼 화려한 꽃을 피운다. 실제 작품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미학적 고찰까지 더해지면서 술은 현대의 문학예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이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성찰을 존재이유로 갖는 문학예술이 ‘현재’에 함몰되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가기 위한 주요한 에너지로서 말이다.


그 가장 뚜렷한 증거가 바로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다. 그 자신 현대시의 기원이 된 이 시집의 한 장을 ‘술’에 바치면서 다섯 편의 시를 남기는 것은 물론이고, 『인공낙원』을 포함한 글 곳곳에서 술 자체에 대한 고찰은 물론이려니와 술로 빚어진 풍경을 그려 보이고 있다. 현재의 우울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어딘가 도취할 곳을 찾던 보들레르에게 술은 그만큼 절실한 유혹이었다.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취하는 일이야말로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그대의 허리를 땅으로 굽게 하는 무서운 시간의 중압을 느끼지 않기 위한 유일의 과제이다. 쉬지 않고 취해야 한다

무엇으로? 술, 시 혹은 도덕, 당신의 취향에 따라. 하여간 취하시오.
그리하여 당신이 때로 고궁의 계단이나 도랑의 푸른 잔디 위에서, 또는 당신 방의 삭막한 고독 속에서 취기가 이미 줄었든가, 아주 가 버린 상태에서 깨어난다면 물어보시오.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벽시계에게, 달아나는 모든 것, 탄식하는 모든 것, 구르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물으시오. 지금 몇 시냐고? 그러면 바람은, 별은, 새는, 벽시계는 대답하리다.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당신이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시오! 쉬지 말고 취하시오! 술로, 시로 또는 도덕으로, 당신의 취향에 따라.”


         ――  「취하시오!」 전문

 

이 산문시는 보들레르의 이상향인 ‘도취’의 세계가 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문제는 남는다. 취하는 일이 술만의 영역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취할 것인가?
보들레르는 문학이 하나의 ‘마법magic’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 표현이 전적으로 보들레르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낭만주의 이후 문학예술은 알게 모르게 현실과 이상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어 매혹적인 세계로 이르는 마술을 꿈꾸어왔기 때문이다. 거기서 예술가와 독자가 소통하며 하나가 되는 순간이야말로 문학예술의 궁극적인 존재이유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보들레르 자신이 그 마법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하얀 마법’이며, 다른 하나는 ‘검은 마법’이다. 위에서 인용한 시와 관련하여 설명하자면, 시와 도덕으로 취하는 것은 ‘하얀 마법’이 될 것이고, 술이나 마약으로 취하는 것은 ‘검은 마법’이 된다. 선악을 초월한 절대적 미를 찾으려 했던 보들레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 하얀 마술은 긍정적인 것이며, 검은 마술이 부정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점 『인공낙원』에서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잘 증명하고 있다.

 

결코 금식도, 기도도 하지 않았고, 스스로 일하여 구원을 얻으려 하지 않던 이 불행한 사람들은 검은 마법의 힘을 빌려 단번에 초자연적 존재로 올라가는 방법을 구한다. 하지만 마법은 그들을 속이고, 그들을 거짓 행복으로 유인하며 거짓된 불을 켠다. 반면 우리 시인과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일하고 명상하여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삶의 빛을 던져준다. 꾸준히 의지를 단련시키고 마음을 고결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참된 아름다움의 정원을 마련해주었다. 믿음이 산을 움직인다는 말을 믿으면서 신이 우리에게 사용하도록 허락한 유일한 기적을 성취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여기서 환각 속에서 거짓 도취에 시달리는 대중과 진정한 도취에 다다르는 시인을 구별하고자 한다. 그러한 분별은 보들레르 스스로 술과 마약의 폐해를 뼈저리게 겪었다는 데서 온다. 술과 마약을 통해 얻는 순간의 황홀경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며, 오히려 깨어난 뒤에는 더 커다란 허무와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들레르는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시 쓰기에 있어 낭만적 영감을 거부하고 고전적 명징함과 냉철한 의식을 높이 평가한 그로서는 술이 가져올 감정의 과장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자아의 과도한 발현은 적절하게 제어될 때만 아름답다는 것이 보들레르와 다른 낭만주의 시인들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에게 있어서 낭만적 자아의 확산은 반드시 그 자아의 또 다른 집중을 필요로 한다. 술은 그런 점에서 위험한 유혹이다. 인간이 기필코 돌아가야 할 ‘도취의 낙원’을 ‘순간적인 환각’으로 보여줄 수는 있지만, 자아를 파괴시킴으로써 그 환각을 ‘지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에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정한 예술은 도취의 낙원, 즉 인공낙원을 가능케 한다고 보들레르는 믿었다. 물론 그때의 낙원 또한 순간적이라는 차원에서는 환각일 수 있지만, 그것은 반복되며 되살아날 가능성을 지닌다는 차원에서 더 이상 덧없는 환각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점은 보들레르의 시적 계승자인 발레리가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의 시란 언어로써 시적 상태를 산출하는 일종의 기계다.” 보들레르나 발레리에 따르면, 낭만적 열광은 시인의 심경이 아니며, 자신의 꿈을 그리려 하는 자는 오히려 명철하게 깨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술과 하나로 엮인다. 술은 현재의 ‘너머’로 가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천지가 찬란하구나!
재갈도 박차고 고삐도 없이,
술 위에 걸터타고 떠나들 가자
거룩한 선경仙境의 하늘을 향해!

끈덕지게 달라붙는 환각에
시달리는 두 천사와 같이,
맑고 푸른 아침을 뚫고
아득한 신기루 따라서 가자!

슬기로운 회오리바람의
날개 위에 둥실둥실 흔들리면서,
너도 나도 다 같이 무아경 속에,

누이여 나란히 헤엄쳐 가자,
한시도 쉬지 말고 날아서 가자
꿈속에 그리던 낙원을 향해!


 ――  「연인끼리의 술」 전문

 

보들레르는 이미 『악의 꽃』 1부에 해당하는 ‘우울과 이상’ 시편의 「여행에의 초대」를 통해 ‘누이’를 부른 적이 있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누이를 불러, 그것이 비록 “아득한 신기루”일지도 모르지만 “꿈속에 그리던 낙원을 향해” 가자고 초대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너도 나도 다 같이 무아경 속에” 빠질 수 있는 술이 필요한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술의 영혼이 병 속에서 노래하기를
“인간이여, 오 친애하는 낙오자여, 나 그대에게
내 유리의 감옥과 주홍빛 봉랍封蠟 아래서
빛과 우애로 가득 찬 노래를 들려주련다!

나는 아나니 내 목숨 낳고, 나에게 얼을 넣기 위해선,
불타오르는 언덕 위에서 얼마나 많은 노고와 땀과
그리고 이글거리는 햇빛이 필요한가를,
그런데 어찌 그 은혜 저버리고 심술궂게 굴겠는가!

일에 지친 사람의 목구멍 속에 떨어질 때면
나는 무한한 기쁨을 느끼고,
그의 뜨거운 가슴은 이 싸늘한 지하실보다
훨씬 더 즐거운 아늑한 무덤이기에.

그대는 들리는가, 주일의 노랫가락 울려 퍼지고
뛰노는 내 가슴에 희망의 노래가 재잘거림을?
탁자에 팔을 짚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그대는 나를 찬미하고 흐뭇해하리.
나는 그대의 기뻐하는 아내의 눈을 빛나게 하고,
그대의 아들에겐 힘과 혈색을 돌려주고
이 연약한 인생의 경기자를 위하여
투사의 근육을 굳혀줄 기름이 되리.

나는 식물성의 불사약, 영원한 파종자가 뿌린
귀중한 씨앗, 나는 그대의 속에 떨어지리,
우리들 서로 사랑하여, 진기한 꽃처럼
하느님 향해 솟아오를 시가 태어나도록!”


       ――  「술의 영혼」 전문

 

“서로 사랑하여, 진기한 꽃처럼 하느님 향해 솟아오를 시가 태어나도록” 술은 연인처럼 인간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다. 그런데 보들레르가 실제로 술을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젊은 시절 친구인 귀스타브 르 바바쇠르나 보들레르의 인물사진을 찍어 남기며 깊은 교분을 가진 당대의 사진가 펠릭스 나다르에 따르면, 보들레르는 술을 잘 절제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파괴된 육신도 술보다는 다른 약물의 결과일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다른 연구자에 따르면 보들레르는 20대 중반부터 무절제하게 술을 마셨다고도 한다.


어쨌든 죽기 한 해 전인 1886년 1월 15일자 편지에서 보들레르 자신이 술에 대해 중요한 언급을 남기고 있다. “맥주를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옳습니다. 차와 커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은 마땅치 않게 여겨지긴 하지만, 그 정도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포도주까지 마시지 말라니요? 젠장할, 그건 너무 심합니다!” 그러니 적어도 술과 무관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니 오히려 ‘태양의 아들’인 술을 통해서 ‘장엄한 마법’을 보려 하였다.
그런데 무엇 때문이었을까? 현실 속에서는 패배한 시인의 자기위안일까? 이 순간 보들레르는 스스로를 넝마주이로 비하하며 술을 찾는다.

 

바람에 불꽃 나부끼고 유리 삐걱거리는
가로등 붉은 불빛 아래,
부글부글 괴어오르는 술처럼 인간들 우글거리는
진창의 미로迷路, 옛 성문 밖 거리 한복판에서,

흔히 보이는 것은, 고개를 휘저으며 비틀거리고,
시인처럼 담벼락에 부딪치며 걸어오는 넝마주이,
밀정密偵 따위는 제 신하처럼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영광스런 계획 품은 가슴 속을 죄 털어놓는다.

선서를 하는가 하면, 숭고한 법률도 공포하고,
악인들은 타도하고, 희생자는 거들어 일으키고,
옥좌 위에 드리운 포장 같은 궁륭穹퀙 아래
저 자신의 찬란한 덕행에 도취한다.

그렇다, 살림의 고달픔에 쪼들린 사람들,
고된 일에 지치고 나이에 시달리고,
거대한 파리의 지저분하게 게워낸 오물,
산더미 같은 쓰레기 아래 녹초가 되고 꼬부라져서,

술통 냄새 풍기며 집으로 돌아간다,
낡아빠진 깃발처럼 콧수염은 축 처지고,
나날의 싸움에 백발이 된 한패를 거느리고서.
그들 앞에는 깃발이다 꽃이다 개선문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구나, 아 장엄한 마법이여!
그리고 나팔과 태양, 함성과 북소리도
요란스러운 그 휘황한 법석 속에서
사랑에 취한 민중에게 그들은 영광을 가져다준다!

이리하여 술은 부질없는 인생을 가로질러서
황금 속에 굴러간다, 눈부신 팍톨 강과도 같이.
사람의 목구멍 통해 술은 제 공훈을 노래하고,
갖가지 선물을 베풀어 참다운 왕처럼 군림한다.

말없이 죽어가는 저 모든 저주받은 늙은이들의
원한을 재우고 무감각을 달래려고
하느님은 뉘우침에 사로잡혀 잠을 만드셨는데,
인간은 술을 덧붙였다, 이 거룩한 태양의 아들을!


――  「넝마주이의 술」 전문

 

그러나 ‘장엄한 마법’을 가능케 하는 술을 마심으로써 잠을 만든 신의 지위와 동격에 오르는 것. 모욕의 삶 속에서도 ‘시詩의 종교’를 꿈꾼 보들레르에게 그러니 술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마법의 에너지를 가득 품고 있는 ‘거룩한 태양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현실에서는 넝마주이에 불과할지 모르나 술은 그를 신의 자리로 이끌고 간다. 다음과 같은 시구는 거기서 나온다.

 

모두가 너만 못하다, 오 그윽한 술병이여,
갈증 난 가슴 지닌 경건한 시인을 위해
네 넉넉한 뱃속에 간직하여 둔 그 향기 높은 술만은.

너는 시인에게 부어준다, 희망과 젊음과 생명을,
― 그리고 긍지를, 이야말로 온갖 거지 근성의 보배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고 신들과 같게 만들어준다!


  ――  「고독자의 술」 부분

 

이처럼 술의 에너지를 듬뿍 받은 ‘인간―신’은 바로 ‘시의 종교’를 세우고자 했던 보들레르의 예술적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스런 술 안으로 빠져 들어갈 수만은 없다. 자아의 과도한 확산 속에서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이란 말의 구원이 사라진 자리에서 극단적 자아 파열이 펼쳐지는 상황이다. 보들레르는 그 순간에도 자아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말을 창조해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아의 도취도 그 자아의 주인공이 시인인 한 하나의 시학詩學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셀 레이몽이 지적하듯이, 현대시의 기원 보들레르에게서는 두 가지 물줄기가 흘러나간다. 하나는 베를렌느와 랭보를 거쳐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라르메를 거쳐서 발레리로 향해 가는 것이다. 앞의 것은 자아와 세계의 심연을 향해 떠난 모험이었고, 뒤의 것은 그 모험을 말로 그릴 수 있을지를 탐구하는 또 다른 종류의 모험이었다. 그 둘이 초현실주의와 발레리로 나뉘기 전 잠깐 아폴리네르에게서 합쳐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보들레르가 빚은 술의 에너지 가득한 도취의 시학은 지금도 발효 중이다. 랭보의 「도취의 아침」과 아폴리네르의 「포도월葡萄月」을 거쳐 온 그 말들. 취기 가득한 그 말들이. 여기 잠시 아폴리네르의 것을 꺼내 술과 말이 익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사랑받지 못했으나 아름다운 노래에 말이다.

 

〔…〕 그리고 내가 말할 수 없는 모든 것
내가 결코 맛보지 못할 모든 것
파리가 갈망하던
순수한 포도주로 변한 이 모든 것 이 모든 것이
그때 나에게 떠올랐네

일 아름다운 날들 지독한 잠
초목 짝짓기 영원한 음악
움직임 숭배 신성한 고통
너희를 닮고 우리를 닮은 세계들
나는 너희를 마셨어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노라

허나 그때부터 난 알았네 우주가 무슨 맛인지
물결이 흘러가고 너벅선들이 잠들어 있는 강변에서
모든 우주를 마신 탓에 전신에 취기가 도네.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오 나는 파리의 목청이니
마음이 내키면 또다시 우주를 마시리라

내 만유명정漫遊酩酊의 노래를 들어주오

9월의 밤이 서서히 다 지나갔고
다리의 붉은 가로등이 센 강으로 꺼져갔네
별들이 사그라지고 이제 막 날이 밝아왔네


            ――  「포도월」 부분

 

박철화   1965년 춘천 출생. 중앙대 교수. 1989년 월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감각의 실존』 『관계의 언어』 『우리 문학에 대한 질문』 『문학적 지성』 등.


술은 인정이라    외 1편
조    지    훈

 

제 돈 써가면서 제 술 안 먹어 준다고 화내는 것이 술뿐이요, 아무리 과장하고 거짓말해도 밉지 않은 것은 술 마시는 자랑뿐이다. 인정으로 주고 인정으로 받는 거라, 주고 받는 사람이 함께 인정에 희생이 된다. 흥으로 얘기하고 흥으로 듣기 때문에 얘기하고 듣는 사람이 모두 흥興 때문에 진위를 개의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흥에 취하는 것’이 오도五道의 자랑이거니와, 그 많은 인정 속에 술로 해서 잊지 못하는 인정 가화佳話 두 가지를 지니고 있다.


17,8년 전 얘기다. 친구 한 사람이 관철동에 주인을 정하고 있어서 통행 금지 시간이 없는 그 때에도 우리를 가끔 붙잡아 재워 주곤 했다. 그 해 겨울 어느 날 몇 사람이 어울려 동아부인상회 맞은편 선술집으로부터 시작해서 〈백수白水〉니 〈미도리〉니 하는 우미관優美館 골목을 휩쓸고 내처 〈백마白馬〉니 〈다이야몬드〉니 하는 카페로 돌아다니며 밤 깊도록 마시고 나서 어찌된 셈인지 뿔뿔이 다 흩어지고 말았다. 대취한 나는 발걸음이 자연 관철동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친구집 대문을 흔들고 들어가 그 친구가 쓰는 문간방에서 방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냥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떠 보니 이건 어찌된 셈인가. 옆에 자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라 반백이 넘은 노인이었다. 방 안을 살펴보니 내가 노상 자곤 하던 친구의 방이 아니었다. 나는 쑥스럽고 놀랍고 해서 슬그머니 일어나 뺑소니를 치려던 참이었다. 늙은이라 나보다 먼저 잠이 깨어 있던 그는 완강히 나를 붙잡았다.


“여보 노형, 해장이나 하고 가야 피차 인사가 되지 않소?”
나는 그 때만 해도 아직 소심과 수줍음이 심할 때라 이 말 한 마디에 그만 취했을 때의 야성은 간 곳 없고 망연자실하여 한참을 서 있다가 그냥 주저앉았다. 그 노인은 내가 앉는 것을 보고는 일어나 주전자와 냄비를 들고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조금 뒤에 따끈하게 데운 술과 뜨거운 해장국 상을 앞에 놓고 이 노소老少 두 세대는 이내 담론이 풍발風發했다. 다시 술이 취한 뒤에사 알았거니와 내가 친구집인 줄 알고 문을 흔들 때 열어 준 사람도 자기였다는 것이다. 밤은 깊고 날은 몹시 추운데 낯모를 젊은이지만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서슴지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와 앉혀 놓고 잠이 드는 내 꼴이 재미가 있더라는 것이다. 백발의 위의威儀에다가 무디지 않은 그의 인품이 엿보이는 이 노인은 자기도 젊었을 땐 그런 경험이 있다는 것을 따뜻한 표정으로 말해 주었다. 그가 장성한 아들을 꺾었다는 것도 알았다. 무척 애주가이기 때문에 젊은 술꾼인 나의 행장을 미소로써 들으며 흥겨워했다. 사실은 날 재운 것이 길가에 쓰러져 자다가 어떻게 될까 하는 어버이 같은 염려도 있었지만 해장술을 한번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나는 그분의 성함도 모른다. 그 노인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술을 아는 이만이 서로 알아주는 그것이 바로 따뜻한 정임을 이 일로써 깨달았다.


또 하나는 바로 1·4후퇴 때 일이다. 1월 3일 밤 여덟시에 마포를 건너 수원에서 자고 거기서 기차를 탄 것이 7일 아침에야 대구에 내렸었다. 그 동안 사흘 밤을 우리는 기차 안에서 잤거니와 이 이야기는 어느 작은 역을 이른 아침에 기차가 닿았을 때 일어난 이야기다. 지붕에까지 만원이 된 피난열차가 플랫폼에 멈추자 재빠른 사람들은 모두 내려와 불을 피우고 밥을 짓느라고 부산하였다. 비꼬인 몸과 답답한 가슴을 풀어 보려고 비비면서 뛰어내려 나는 아주 희한히 반가운 일을 보았다. 어떤 여인이 플랫폼 한쪽 귀퉁이에 불을 피워 놓고 약주를 팔고 있지 않겠는가? 벌써 어떤 중년 신사가 한 잔 들이켜고 있었다. 나는 얼른 뛰어가서 그저 덮어놓고 한 사발 달래서 쭉 들이켰다(그 술맛의 쾌적했음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리라). 안주로 찌개 둬 숟갈도 들었다. 아무래도 미진해서 한 사발만 더 달랬더니 어쩐 일인지 술 파는 부인은 웃기만 하고 술도 대답도 주지를 않았다. 그 때 둘째 잔을 마시고 있던 중년 신사는 술잔을 놓고 유심히 눈웃음을 지으며, “선생도 술을 무던히 좋아하시는구려…… 목 마르신 것 같아서 한 잔 권했지만 이 술은 파는 게 아니요, 부산까지 가는 동안에 이렇게 아침 저녁으로 한두 잔씩 하려고 가져온 겁니다.” 하면서 술을 더 못 주는 이유는 말하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어 입을 닦으면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글쎄 자기 피난 짐은 아무것도 꾸릴 필요가 없다면서 약주 여섯 병만 묶어 들고 나섰잖아요. 호호호.”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는 그 여인, 돈 안 받고 술을 팔던 그 여인은 물론 그 신사의 부인이었다.
술로써 오달悟達한 그 체관諦觀과 유유함이 이 혼란 중에 한층 의젓하고 멋이 있어서 부러웠다. 그는 기차가 이렇게 천천히 간다면 부산까지 가는 동안에 술이 모자랄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둘이 마주 쳐다보고 함께 웃었다. 그렇게 아끼는 술을 말없이 주는 인정, 이것이 술을 아는 마음이요 인생을 아는 마음이 아니냐. 파는 술인 줄 알고 당당히 손을 내민 내 행색은 지금도 고소苦笑를 불금不禁하거니와 낯모르는 사람에게 흔연히 한 잔 따라주던 그 부인도 인생의 진미를 체득한 것 같았다. 이것이 모두 술의 감화라고 생각하면 약간의 허물이 있다 해서 덮어놓고 술을 폄貶하는 폭력 의지는 아직 술을 모르는 탓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

 

주도酒道유단有段
조    지    훈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기고만장하여 영웅호걸이 되고 위인偉人 현사賢士도 안중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주정만 하면 다 주정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酒格은 높아지지 않는다. 주도酒道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술을 마신 연륜이 문제요, 둘째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셋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며, 넷째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 술 버릇,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단段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음주에는 무릇 열여덟의 계단이 있다.
① 불주不酒 :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
② 외주畏酒 :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③ 민주憫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④ 은주隱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⑤ 상주商酒 : 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술을 내는 사람.
⑥ 색주色酒 : 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⑦ 수주睡酒 :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⑧ 반주飯酒 : 밥맛을 돕기 위해서 마시는 사람.
⑨ 학주學酒 : 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酒卒.
⑩ 애주愛酒 :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酒徒.
⑪ 기주嗜酒 :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酒客.
⑫ 탐주耽酒 :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酒豪.
⑬ 폭주暴酒 : 주도酒道를 수련하는 사람酒狂.
⑭ 장주長酒 : 주도 삼매에 든 사람酒仙.
⑮ 석주惜酒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酒賢.
? 낙주樂酒 :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酒聖.
? 관주觀酒 :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酒宗.
? 폐주廢酒·열반주涅磐酒 :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불주·외주·민주·은주는 술의 진경眞境·진미를 모르는 사람들이요, 상주·색주·수주·반주는 목적을 위하여 마시는 술이니 술의 진체眞諦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학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酒道 초급初級을 주고 주졸酒卒이란 칭호를 줄 수 있다. 반주는 2급이요, 차례로 내려가서 불주가 9급이니 그 이하는 척주斥酒 반주당反酒黨들이다.
애주·기주·탐주·폭주는 술의 진미·진경을 오달悟達한 사람이요, 장주·석주·낙주·관주는 술의 진미를 체득하고 다시 한 번 넘어서 임운자적任運自適하는 사람들이다. 애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酒道의 초단을 주고 주도酒徒란 칭호를 줄 수 있다. 기주가 2단이요, 차례로 올라가서 열반주涅磐酒가 9단으로 명인급名人級이다. 그 이상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니 단段을 매길 수 없다.


그러나, 주도酒道의 단은 때와 곳을 따라, 그 질량의 조건에 따라 비약이 심하고 강등이 심하다. 다만 이 대강령만은 확호確乎한 것이니 유단有段의 실력을 얻자면 수업료가 기백만금이 들 것이요, 수행修行 연한이 또한 기십 년이 필요할 것이다(단, 천재는 비한比限에 부재不在이다).
요즘 바둑열이 왕성하여 도처에 기원이다. 주도열酒道熱은 그보다 훨씬 먼저인 태초 이래로 지금까지 쇠미한 적이 없지만 난세는 사도斯道마저 추락케 하여 질적 저하가 심하다.


내 비록 학주의 소졸小卒이지만 아마추어 주원酒院의 사범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건만 20년 정진에 겨우 초급으로 이미 몸은 관주觀酒의 경境에 있으니 돌돌口出口出, 인생사 한도 많음이어!
술 이야기를 써서 생기는 고료는 술 마시기 위한 주전酒錢을 삼는 것이 제격이다. 글 쓰기보다는 술 마시는 것이 훨씬 쉽고 글 쓰는 재미보다도 술 마시는 재미가 더 깊은 것을 깨달은 사람은 글이고 무엇이고 만사휴의다.


술 좋아하는 사람 쳐놓고 악인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술꾼이란 만사에 악착같이 달라붙지 않고 흔들거리기 때문이요, 그 때문에 모든 일에 야무지지 못하다. 음주 유단有段! 고단高段도 많지만 학주의 경境이 최고 경지라고 보는 나의 졸견은 내가 아직 세속의 망념을 다 씻어 버리지 못한 탓이다. 주도의 정견正見에서 보면 공리론적功利論的 경향이라 하리라. 천하의 호주好酒 동호자 제씨의 의견은 약하若何오.

 

조지훈   1920년 경북 영양 출생. 시인. 1939년 《문장》지로 등단. 자유문학상 등 수상. 고려대 교수 역임. 1968년 작고. 시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 앞에서』 등과 수필집 『돌의 미학』, 그외 『조지훈전집』 등이 있음.


취호 일필醉毫 一筆의 가을
허    만    하

 

나에게는 김종길 시인의 날려 쓴 행서 취호醉毫가 있다. 관인款印은 없으나 丙辰 孟秋 共醉 兩 許友 三秀學人이라는 낙관으로 보아 1976년 가을의 필적임을 알 수 있다. 이 필적을 대할 때마다 약 30년 전의 서울 거리를 불던 가을 바람이 생각난다. 이어서 인사동의 ‘선천집’에서 방바닥에 종이를 펴고 붓을 잡고 춤추듯 붓을 놀리던 그의 팔놀림의 속도감과 동석했던 박양균 시인과 벗 김윤환(조선일보 편집부장?― 대구 시절 나와 『시와 비평』을 창간했었다)의 모습과 유난히 밝던 방안 조명, 그리고 윗목으로 밀어제쳤던 길다란 술상(잡다한 접시들이 있었다)이 아득한 세월의 지평 너머에서 달무리처럼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우리들 넷이 어떻게 선천집에 모여들었는지 전후 사정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오랜만에 상경했었던 내가 계기가 되어 김윤환이 두 선배 시인들께 기별을 드렸던 것이 아닐까 짐작될 따름이다. 나는 그 날 서울에서 이조 선비들 시 모임에 동참하고 있는 듯한 흐뭇한 기운에 젖을 수 있었다. 그것은 알맞은 온도로 탕간이 된 청주잔을 들고 한시를 읊던 김종길 시인이 갑자기 여주인에게 벼루와 붓을 요구하여 상을 한쪽으로 밀고 방바닥에 모포와 화선지를 깔게 하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즉흥 한시를 날려 쓰기 시작한 것이다. 취흥의 흔적이 배어 있는 그의 즉석 휘호는 드문 것이리라.


그 시는 다음과 같다. 詩情暈作心頭月(시정은 마음머리에 달을 띄우고) 談屑瓢生口角秋(이야기는 표표히 입가에 가을을 낳는다)는 대구對句이다.
사실 이 시는 삼수학인(김종길 시인은 한때 이런 호를 썼었다)의 즉흥시가 아니라, 안동의 선비 김수산金秀山(포항공대 초대 총장이었던 김호길 박사의 조부)의 시구절이다. 그는 김종길 시인을 천자문에 입학시킨 다음해 별세했던 이름 높은 한학자였다 한다. 알코올 성분보다 시적 흥취에 취한 김종길 시인은 화선지가 모자라 더 구할 길이 없게 되자, 어디서 나왔는지 흰 천에 한시 휘호를 계속하고 있었다. 당신도 잊어버리고 있을 그때의 휘호를 나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 이 취호에서 입가에 맑은 가을을 낳던 그 날의 담소가 조용히 울려오는 것을 어찌 고이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을 햇살이 고왔던 지난해 10월 17일, 우리는 내가 주인공이 된 한 조촐한 문학상 시상식이 파한 뒤 인사동 골목을 찾아들었었다. 김종길 시인과 조영서, 이수익, 이재훈, 정재학 시인과 우리 내외였다. 그때 우리 일행은 조그마한 기와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 기와집이 파격적인 시회詩會로 이어진 옛날 네 사람의 만남이 있었던 인연의 자리란 사실과 그 집 옥호가 선천집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득한 옛날 단 한 번밖에 들른 적이 없는 집이었지만 그 집 앞을 지나는 일이 어쩐지 슬며시 반가웠다.


대구 향촌동 고전음악 다실 ‘녹향’에서 처음으로 김종길 시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마주 앉아 기탄 없는 담소를 나눈 끝에 “선생님 술 하십니까?”라는 질문 끝에, 거리낌 없이 둘이서 내가 다니던 목로 막걸리집을 향했던 그 시절을 다시 만나는 듯한 반가움 같은 것이었다. 내가 서서히 시인이 되어 가고 있던 무렵이었다. 우리는 ‘nice and cozy’한(그 무렵 김종길 시인이 쓰던 말이다) 분위기를 술집 선정의 기준으로 삼았었다. 긴 나무의자가 삐걱거리는, 옥호도 없는 이 목로집에서 우윳빛 막걸리 잔을 나누고 헤어졌던 우리 또래 외지 시인들로는 야간열차로 부산에서 상경하던 길에 만나보고 싶은 생각으로 불쑥 대구에서 열차를 내려버렸다고 녹향 다방을 찾아온 조영서와 고석규(그때 나는 공교롭게도 김종길 시인과 함께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박성룡, 신경림이 기억의 수평에 떠오른다. 신경림은 그 무렵 문화부장 남욱의 권유로 《대구일보》에 소설을 연재했었다. 입영을 며칠 앞둔 그는 그 인연으로 남욱과 함께 왔었다. 모두 초면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상한 동지의식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인생에서 시의 길을 택했다는 동지의식이었는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모두가 《문학예술》지와 인연이 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우연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청순한 한 시절도 세월의 뒤안길에 묻혀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서 내가 가지고 있는 김종길 시인의 취호 일필은 잃어버린 귀한 시절을 다시 되살려 주는 소중한 보배로 나와 함께 있다.

 

허만하   1957년 《문학예술》 추천. 한국시인협회상, 박용래문학상 등 수상. 시집 『해조』 『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등과 산문집 『길과 풍경과 시』 『낙타는 십리 밖 물냄새를 맡는다』가 있음.


술과 시인
이        탄

 

술을 입에 대본 것은 중학교 1학년쯤이 아닐까 싶다. 집에서 술상을 차릴 때 손님의 숫자에 따라 막걸리를 받아오는 주전자의 크기가 바뀌게 돼 있다. 그 심부름을 내가 도맡아 해야 했다. 부산 동래온천에서 피난시절을 보낼 때의 일이니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피난시절이라 생활이 그리 넉넉지 않은 탓에 이런 술 심부름은 1년에 두서너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술심부름을 하는 도중에 주전자에 입을 대고 맛을 보는 것이 내가 처음 술을 접하게 된 계기다. 술집에서는 주전자가 꽉 차게 술을 주었는데, 그것을 들고 오려면 자연 흘리게 마련이니 내가 미리 먹어 두는 것은 하등 잘못된 것이 없다고 핑계를 대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과 술집은 15분쯤 떨어져 있는데 그 거리를 오가는 동안 나는 술을 한 사발은 먹었던 것 같다. 그때 아버지는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시고 술이 가득 차 있지 않으면 꾸지람을 하시곤 했는데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시간은 흘러 고교 때 친구가 다니는 고계고등학교의 선생님과 친했는데, 그 선생님은 막걸리를 잘 마셨다. 우리 몇이 어울려 선생님을 찾아가면 으레 막걸리가 나왔는데 안주는 두부하고 김치였다. 우리는 매번 나오는 것이 두부뿐이냐고 하면서도 두부를 정신없이 먹어댔다.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술을 무슨 맛을 알고 먹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술이니까 먹어대는 것이다. 그렇지만 주도를 선생님한테 배웠던 것이니 술은 잘 배운 셈이다. 고교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대학시절도 모여서 입에 술칠을 했지만 그저 그렇게 지나갔던 것 같다. 그냥 그렇게 대학을 다니면서 술과의 이렇다 할 인연을 만들지는 못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해 다니면서 하루 일과가 끝나면 술 생각이 났다. 이때 자주 술을 마시러 다니던 곳은 중국집 아니면 바bar였다. 그리고 종로 5가에서 시작된 술자리가 몇 차까지 이어지면서 취하면 집에 돌아와 구석진 곳을 찾아 잠을 청하곤 했다. 이렇게 맺은 술과의 인연에서 기억에 남는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세종호텔 근처의 바에서 생긴 일이다. 혼자서 술을 먹고 있는데, 웬 여자가 내 옆에 앉더니 술을 시켜서 먹는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술을 바텐더에게 물어가면서 시켜먹는 중이었는데, 여자는 술을 시키는 폼이 술에 관해서는 나보다 한수 위인 것 같았다. 하버라이트는 바텐더의 기분에 따라 술의 맛이 달라지는 술이다. 내가 즐겨 먹던 술 중 하나였기에 나는 몇 잔을 거푸 마셨던 것 같다. 그런데 내 옆에 앉은 여자도 그 술을 시켜 연달아 몇 잔을 먹는 것이다.


취기가 오른 나는 집에 가 잠을 청하기 위해 계산을 하고 그 바를 빠져 나왔다. 그랬더니 여자도 언제 나왔는지 계산을 하고 나와선 내 옆에 따라붙는 게 아닌가. 그 여자가 따라붙는 것이 싫었던 나는 택시를 집어타고 얼른 집으로 가고 싶었다. 택시를 잡고 타는데 그 여자도 같은 택시를 타는 것이다. 황당한 마음도 있었지만 정신을 가다듬어 ‘집이 어디요.’ 하고 물었더니 아무런 대답 없이 앉아 있다가 내가 내리는 종로 5가에서 같이 내리는 것이다. 종로 5가 대동여관에 갈 수밖에. 그곳은 내가 술을 먹으면 집에 가기 귀찮을 때 가끔 들러 잠을 청하는 곳이다. 같이 여관에 들어서니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같은 방에 들어서 이불 두 채를 썼다. 따로 이불을 쓰고 누워 있으려니 취기 탓에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묘령의 그 여자는 언제 갔는지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에 회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아무개를 아느냐는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직감적으로 며칠 전 보았던 그 여자 생각이 났다. 그 전화의 목소리는 남자였는데 그 여자가 자기 부인이라고 하면서 한 번 만나자는 것이다. 약속을 정하고 다방에 가서 앉아 그를 기다렸다. 다방엔 동료 직원과 함께 갔는데 모르는 사이처럼 따로 떨어져 앉았다. 시간이 얼마쯤 흘러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내가 만약 그날밤 그 여자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막막하기까지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둘 사이가 의심되었는데 아마 사기꾼이었던 것 같다.


한번은 여름철이었는데 술을 먹고 버스를 잘못 타서 생긴 일이다. 구로동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술에 취해 장위동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잘못 탄 것을 알고 무작정 버스에서 내렸다. 내려서 보니 그곳은 참외밭이었다. 술에 취해 뒤뚱뒤뚱 걸어가다 보니 참외를 몇 개나 깨뜨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언제 왔는지 주인이 순경까지 불러와선 깨뜨린 참외값이 얼마고 사는 곳은 또 어디냐고 묻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 주인이 나를 잘 봤는지 여관까지 잡아주면서 술이나 깨고 나서 얘기하자는 것이다. 아침이 되어 깨어나 보니 그 참외밭 주인은 어느새 내 옷까지 빨아다 놓았다. 고마운 마음에 참외값과 여관비를 지불하기 위해 지갑을 열어보니 돈이 부족했다. 나는 동료에게 연락해서 돈을 가져다 달라고 했고, 그 주인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돈을 지불했다.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이였다.


한번은 소설가 김국태 씨와 만화가 이소림 씨와 술을 먹다 생긴 일이다. 그 술집은 독주를 파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던 집이었다. 술꾼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자자하던 집인데, 독특한 것은 술을 주인이 주는 만큼 먹어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아마 한 되 이상은 안 파는 모양이었다. 세 되를 시켜 먹고 일어서려는데 어쩌다 보니 실랑이가 벌어져 좀 더 먹게 되었다. 이소림 씨는 먼저 가고 나와 김국태 씨만이 남았는데, 계산을 하고 그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앞서 가던 김국태 씨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필 그 집 앞에 공사 때문에 도랑을 파 놓았고, 술에 취한 김국태 씨가 그만 그곳에 빠져버린 것이다. 옷이 엉망이 되었다.  
그곳에서 회사까지 몇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일단 그곳 숙직실로 갔다. 숙직실에 도착해 옷을 빨아 여기저기 늘어놓고 잠이 들었다. 새벽이 되어 눈을 뜨니 김국태 씨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물어보니 김국태 씨는 과한 술 탓에 결근을 했다고 한다. 양복도 엉망이 되어 빨아 놓았으니 입고 갈 옷도 변변찮았을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로 나는 술을 줄이게 되었다. 그때가 내 나이 28세일 무렵이다. 그리고 그때 당시엔 김국태 씨가 자신의 양복을 빨아놓은 것에 대해 마뜩찮아 하기도 했는데, 걱정이 되어 빨래를 하던 내 마음은 알아주었으면 했다. 지금은 김국태 씨를 만나면 그때 일을 얘기하며 웃곤 한다. 젊은 날의 술이 불러 왔던 사건을 되짚어보며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리라.  
      
이  탄   196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바람불다」 당선으로 등단. 한국외국어대 교수. 월탄문학상, 한국시협상 등 수상. 시집 『소등』, 『줄풀기』, 『반쪽의 님』 외 다수.

 

애술가
이    재    무

 

우리 세대의 경우 처음 술을 배우게 된 동기를 들어보면 대개 엇비슷하다. 초등학교 시절 일하시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하꼬방에 가 주전자 술을 받아오다가 심심풀이 삼아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기 시작한 것이 자신도 모르게 모주꾼이 되었다는 그 흔한 사연 말이다. 나도 그렇다.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술과 관련된 일화가 적지 않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酒와 함께 살아온 그 많은 세월, 술이 가져다준 활력과 기쁨이 적지 않았지만 그 반대로 술로 인해 입은 치명적인 상처 또한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던 게 사실이다. 관계의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참히 무너지게 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물로 만들어진 불은 칼의 쓰임새처럼 상반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때로 청량제가 되어 나날의 삶에 리듬과 악센트를 실어 주기도 하지만 정도를 넘어설 때는 타자에게나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무서운 독이 되기도 한다.


술! 매력적인 여인의 감미로운 혀 같기도 하고 사나운 독사의 혀 같기도 한 그것! 술이 들어오면 우리 몸에 산재한 40조 개의 세포가 새로운 긴장으로 눈을 뜬다. 풍선처럼 몸은 가볍게 부풀어 오르고 동공은 커지면서 풀어져 세상이 조금은 만만해 보인다. 갑자기 다변가가 되어 주변을 어수선하게 만들기도 한다. 술은 의식과 몸을 분리시켜 따로 놀게 만든다. 과장된 몸짓과 공허한 허장성세.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술에 취한 이들 가운데는 상대에 대해 관대해지다가도 표변하여 가혹하게 굴기도 한다. 술은 사람을 인간 이상으로 상승시키다가도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꿔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전락시키는, 악과 선이 공존하는 물物이다. 꼴불견이 따로 없다.


돌아보니 그간 나는 핑계만 있으면 술을 마셨다. 핑계가 없으면 핑계를 만들어 술을 마셨다. 자신의 무기력과 비겁을 술에 의존하여 은폐하여 왔던 것이다. 사랑에 대한 고백도 술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술 힘을 빌려 고백한 사랑이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다. 세상에 대한 좌절과 절망도 술로써 풀어 왔다. 그러나 다음날 깨어보면 나의 좌절과 절망은 곱절이나 더 덩치가 커져 있었다. 술은 백해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익했음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술을 마시면 내 몸 안에 자고 있던 광기와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광기와 짐승은 의지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제멋대로 날뛰었다. 아, 그렇게 나는 수시로 술을 마시고 내 안의 우리 안에서 날뛰는 광기와 짐승을 토해내고는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한동안 평상심을 가지고 가혹한 현실을 조용히 견딜 수 있었다. 술은 나를 세상에 대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만들어 왔다.


이 가해자로서의 느낌이 시를 쓰게 만들었다. 세상에 대한 나의 반성적 사유는 구차하지만 이렇게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 관성의 악순환을 나는 물론 혐오한다.
나는 대화의 기술에 서툰 편이다. 에둘러 말해야 할 것도 직설적으로 툭 던져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이것은 내 각오와는 상관없는 체질이다. 이 약점 때문에 내가 입은 손해가 결코 적지 않다. 이런 나를 사람들은 순박하다고 듣기 좋게 말하기도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세상물정 모르고 함부로 날뛰고 까분다는 말이 될 것이다. 세련된 대화술에 능숙한 이들을 나는 그 얼마나 선망해 왔던가. 직설은 때로 통쾌하고 시원할 수도 있지만 상호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소통의 장애가 생길 경우 그것은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교양 귀족들의 그 자유자재한 화술을 더러 가다 내 것으로 익혀보려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빌려 입은 옷처럼 어색한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직설은 화근을 낳는다. 과도하게 술을 마시면 예의 고질병인 직설이 말썽을 일으키기 일쑤다. 다혈질인 성격에다 그 분별 없고 융통성 없는 직설이라니! 통어되지 않은 말들이 입 속의 혀를 빠져나와 주변의 질서를 어지럽혔던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구제불능이다. 내가 던진 그 많은 말의 독은 다음날 부메랑으로 되돌아와 내 가슴에 칼과 송곳이 지나간 상처를 남긴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자학, 자괴, 자조로 다음날 아침 태양 보기가 부끄러워 백지가 주는 공포에도 불구하고 나는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술이 마냥 내게 위해危害를 가하고 백해무익한 독소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과도하게 마시지 않으면 그것은 느슨한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밀착시키고 크지 않은 허물쯤은 눈감게 하는 관용을 가져다주기도 했던 것이다. 물로 이루어진 불은 생활의 추위를 견디게 해주었다. 또 술은 내게 예상치 않았던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분위기가 좋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실제로 나는 몇 편의 시를 건진 적도 있다.


30년 넘게 마셔온 술!
친구들은 술이 없는 나를 상상하기 힘들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이 결코 명예가 아님을 안다. 하지만 어쩌랴. 이제 술은 내게 버리기에 너무 늦어버린 조강지처라서 때로 지겹고 무섭긴 해도 없는 것보다야 나은 생활의 방편이 되어버린 것을. 다만 앞으로 내가 내게 스스로 당부하노니 부디 주량을 넘지 말고 절제 또 절제하여 지난날의 과오를 다시 살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이재무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한남대 졸업, 동국대 석사과정 수료. 1983년 《삶의문학》 《실천문학》 《문학과사회》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난고문학상 수상. 계간 시전문지 《시작》 편집 주간. 시집 『섣달 그믐』 『벌초』 『몸에 피는 꽃』 등이 있음.

 

「어민후계자 함현수」란 시를 쓴 날
함    민    복

 

아랫집 사는 동생 규호가 왔다.
탕!
(대문 닫히는 소리에 놀라는 봄)
형님 집에 도깨비 노는 것 아니껴?
네가 도깨비다. 사방이 도깨비 천지구나.
예!?
갈라진 땅 주저앉는 것 봐라. 땅 얼며 솟아 대문도 안 닫히더니…
왜 또 그러시껴?
봄엔 다 도깨비다. 갑자기 부지런해지는 농부들, 밀어 올리는 풀들, 한 옥타브 높아진 새소리 다 도깨비에 홀린 것 같지 않냐?
농민 후계자 도깨비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가고. 고욤나무에 앉은 아물쇠딱따구리와 콩새를 보다가 장작을 패는데
형님, 장작 패는 법 아시껴?
나무 공예를 하는 승희가 왔다.
응, 알지. 장작으로 도끼를 쪼개는 게 아니라 도끼로 장작을 쪼개면 되는 것 아니냐.
어제, 석양주 먹다가 익선이 형님한테 배웠는데 나이테 넓은 쪽을 치랍니다.
그러니까 나무들이 숨기고 있는 남쪽을 내리치면 된다는 말이구나.
아하, 그렇군. 혁명하고 같구먼. 오해는 말고. 그러니까 꼭 남쪽이 아니라 편하게 산 쪽. 내가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은 세대라서. 이 못탕 봐라.
뭐 말이껴?
잘못 내리쳐 찍힌 상처, 못탕의 잘록한 허리가 장작개비를 잡아준다.
오늘 나무하러 같이 가시겨?
네가 버린 작품이라고 쪼개 준 의자 덕분에 다리 펴고 누워 오랜만에 따듯하게 잘 잤다. 어제 그 쥐 말이다. 그제 그 쥐가 아닌 것 같다. 아. 그제 아궁이에 쥐가 들어가 잡으려고 신나게 불땠잖아. 플라스틱 병도 태우면서…… 어제 불길 속으로 뛰어든 쥐는 혹 아빠 쥐가 아니었을까. 새끼들 불타죽는데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못한 것을 하루 동안 치열한 후회 끝에 결심을 한.
나무관세음보살이지.
장승 토막은 못 태우겠어. 변강쇤지 아닌지 테스트도 못해 보고 죽을 일 있냐.
그럼 내가 다시 가져가겠시다.
전에 부처님 만드는 경인 조상경을 읽었는데… 그래, 네 마음을 심은 것이니까… 너는… 어쩌면 괜찮을지 몰라.
먹감나무에 대해 얘기를 들려 준 승희가 파다가 만 장승 머리를 들고 갔다.
야성 기르러 안 가시껴? 포구에 나가 숭어 새끼라도 얻어다가 이거 한 잔?
뱃사람 고승준 씨와 어민후계자 함현수 씨가 왔다.
야성, 좋지. 그런데 글 써야 하는데…
야성 기른 담에 쓰면 되지 않으껴.
물때에 맞추어 고기 잡는 것처럼 글도 때를 놓치면 한 사리 또 기다려야 한다니까.
그럼 시가 물고기껴?
봄이구먼. 어부도 도깨비한테 홀려 시를 쓰는구만.
그럼 시 회에다 이거 한 잔?
미치겠네. 좋아요. 가시겨. 다 신데 무슨 시를 써. 봄에.
탕!
(대문 닫히는 소리에 놀라는 봄)


       어민 후계자 함현수

 

형님 내가 고기 잡는 것도 시로 한번 써보시겨
콤바인 타고 안개 속 달려가 숭어 잡아오는 얘기
재미있지 않으시껴 형님도 내가 태워주지 않았으껴
그러나저러나 그물에 고기가 들지 않아 큰일났시다
조금때 어부네 개새끼 살 빠지듯 해마다 잡히는
고기 수가 쭉쭉 빠지니 정말 큰일났시다 복사꽃 필 때가
숭어는 제철인데 맛 좋고 가격 좋아 상품도 되고……
옛날에 아버지는 숭어가 많이 잡혀
일꾼 얻어 밤새 지게로 져 날랐다는데 아무 물때나
물이 빠져 그물만 나면 고기가 멍석처럼 많이 잡혀
질 수 있는 데까지 아주, 한 지게 잔뜩 짊어지고
나오다보면 힘이 들어 쉬면서 비늘 벗겨진 놈
먼저 버리고 또 힘이 들면 물 한 모금 마시면서
참숭어만 냉겨놓고 언지, 형님도 가숭어 알지 아느시껴
언지는 버리고 그래도 힘이 들면 중뻘에 지게 받쳐놓고
죽을 것 같은 놈 골라 버리고 그렇게 푸덕푸덕대는
숭어를 지고 뻘길 십 리 길 걸어나와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곶뿌리 끝에 서서   
담배 한 대 물고 걸어나온 길 쳐다보면서
더 지고 나오지 못한 것을 후회도 했다는데
뻘길 십 리 길 가물가물 멀기는 멀지 아느껴 힘들더라도
나도 그렇게 숭어 타작 좀 한번 해보았으면 좋겠시다

현수 씨  콤바인 타고 들어가 고기 싣고 나오는 얘기는
여차리* 일부 뻘 얘기지만 뻘이 딱딱해진다는
너무 슬픈 얘기라 함부로 글을 쓸 수 없고
아버지 얘기는 그냥 시인데 뭘 제목만
‘인생’이라고 붙이면 되지 않겠어

형님, 한잔 드시겨

 

                 *여차리: 강화도에 있는 마을 이름


함민복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시집 『우울씨의 일일』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나를 찾아가는 길
이    경    림

 

나는 술을 마시는 일보다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어느 처마 낮은 술집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즐거움과, 주위를 흐르는 한없이 풀어진 어떤 기류들, 그 속에 스며 있는 까닭 모를 슬픔…… 뭐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한때는 그런 분위기에 취해 마지막 전철을 놓쳐 총알택시로 집에 간 적도 왕왕 있었다.


술에 관한 기억으로 내게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서울대 병원 영안실이다. 아마도 90년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 어머니는 서울대 병원 심장병동에 장기 입원해 계셨다. 그래서 인사동쯤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언제나 서울대 병원 어머니 병실에 가서 자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나중에는 어머니의 병세가 자꾸 안 좋아져 중환자실에 계시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는 인사동에서 친한 시인 두엇과 오랜만에 만나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편찮으신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회한에 젖어 조금 과음을 하고 어머니를 찾아갔다. 면회시간도 아닌 새벽에 어머니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그 쪽으로 갔던 것이리라.


여름이었는데 새벽의 대학병원 건물은 더욱 육중하고 나무들은 더위와 어둠에 짓눌려 축 늘어져 있었다. 중환자실 문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막막하고 숨이 막혀 밖으로 나와 대학병원 뒤편 비탈을 올랐다. 조금 걷다 보니 마치 이정표처럼 형광색 불빛이 휘황한 영안실이 보였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핏줄도 지인도 아닌, 이승에서 한 번 스친 적도 없을 존재들의 끝을 보았다. 취해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곳은 담배 연기에 싸여 마치 이승이 아닌 듯했다. 그날 나는 문상객이 별로 없는 한 쓸쓸한 빈소 마루 끝에 걸터 앉아 사진 속에서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을까? 40대 중반 쯤의 소박한 인상의 그는 조금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친 상제 몇이 그 앞에 잠들어 있었다. 문득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그 시간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애옥길을 헤매고 있을 어머니 생각에 울었고, 찰나인 생이 부질없어서 울었다. 얼마 후 《현대시학》에 연재한 「이야기들」 속의 <영안실>이라는 제목의 글은 그 때의 경험을 쓴 것이어서 소개한다.

 

그의 앞에는 촛불 둘이 타고 있었다. 향 연기는 그들을 쓰다듬고 천장 밑 허공에 떠 있는 그의 얼굴을 스치며 돌아다녔다. 그는 그의 앞에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발관을 하는 한철이 아버지, 탄지게를 나르는 경배 아버지, 국밥을 말아 파는 재준이 엄마, 욕쟁이 이삐 할매… 그들은 한때 그가 지나온 숲이었다. 그들은 그가 만난 어떤 사나운 짐승, 어쩔 수 없이 딱딱하고 모질었던 돌멩이, 바람에 안절부절 흔들리던 나무, 벌떡 일어서던 절벽, 그 사이로 쉬임없이 흘러다니던 바람이었다. 그들은 자신이면서 한없이 자신이 아니었던…… 산 같은 시냇물 같은 동굴 같은 메아리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형제라는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혹은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기억들이었으며 영원히 읽을 수 없는 어떤 어른거림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그들은 모두 기억 저편의 것들이었다. 그들은 지·나·간 ‘불덩어리’였으며 불가사의였으며 혼돈이었다. 그는 화투를 치고 있는 한 무리의 불덩이들을 보았다. 귀퉁이에서 슬픔에 지쳐 새우처럼 오그리고 잠든 ‘불가사의’를 보았다. 회한에 젖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혼돈을 보았다. 그의 회한이 향불 앞에 지폐 나부랑이처럼 부질없이 놓여 있었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신의 입자들이 뿌옇게 그들의 위를 떠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기류들로 꽉 차 있는 그 지하방은 말할 수 없이 긴 하루의 끝에 놓여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나는 한때 이런저런 이유로 막막할 때면 그곳을 찾곤 했다. 그곳에는 언제나 말할 수 없이 멀고 어두운 길을 걸어 마침내 한 뼘 사진틀 속으로 들어가 물끄러미 이녘을 보고 있는 내가 있었다.

 

이경림   1989년 《문학과 비평》 봄호로 등단. 시집 『토씨 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시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맨  홀
이    윤    학

 

맨홀 위에 철판 뚜껑을 덮어 놓았다. 모서리가 들린 철판 위로 바퀴들이 지나다닌다. 그때마다 쥐덫이 채워진다. 고구마를 깎아 쥐덫 위에 꽂아 놓았다. 쥐덫이 채워질 때마다 좀 전에 깎아 꽂아둔 고구마 살이 보인다.
사무실에서 밤을 새울 때마다 쥐덫에 시달린다. 노란불이 깜박거리는 목감동 거리, 목감 사거리 방향으로 차가 지나간다. 나는 그때마다 쥐덫에 채워진다. 깎아놓은 고구마 살을 지켜본다. 나는 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맨홀 철판이 뒤척일 때마다 맨홀 안을 들여다본다. 서늘한 그곳, 악취가 역류하는 그곳, 이십 몇 년 전, 맨홀 속에서 보낸 하룻밤을 돌아본다.

 

시내에서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17살 여름이었다. 개천에 핀 달맞이꽃을 보았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달맞이꽃을 따 웃옷 주머니에 살짝 찔러 넣고 냄새를 맡았다. 어둑한 밤길을 걸었다. 액자를 하나 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달맞이꽃을 따 액자 유리 속에 눌러 말려놓고 보고 싶었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 액자 대신, 달맞이꽃 액자를 걸어놓고 싶었다.
슈퍼를 끼고 돌아 몇 발자국 걸었다. 난데없이 아스팔트가 꺼졌다. 앞서 디딘 발이 아스팔트 속으로 꺼졌다.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에 따라오던 발은 앞선 발을 따라왔다. 꺼진 아스팔트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턱주가리부터 얼굴 마빡까지 꺼진 아스팔트 모서리가 시원하게 긁었다.


나를 받아준 것은 진창이었다. 제발 목욕 좀 하고 살아라. 옆구리 팔다리도 아스팔트 모서리가 시원하게 긁었다. 나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허벅다리를 꼬집었다. 접질린 허리가 숨쉬기를 방해했다. 통증이 몰려왔다. 공사중이었다. 아스팔트 아래로 별들이 내려왔다.


숨쉴 때마다 통증이 배가 되어 몰려왔다. 누굴 부를 수도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엔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앞도 제대로 보고 걷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한눈을 팔고 살았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고소해 웃는 사람들 얼굴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입으로만 숨쉴 수 있었다.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아스팔트 위 별들만 눈물 속으로 유릿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항복 자세로 손을 들어 아스팔트를 잡으려고 했었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높이에 아스팔트가 있었다.
나는 내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벙어리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가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맨홀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며칠을 폭음하다 깨어나면 맨홀 진창 속이다. 나는 그 자리에 와 있다.

 

술을 먹고 잔 날에는 꿈속에서 시를 쓰곤 한다. 너무나 선명한 꿈이다. 너무나 완벽한 시다. 일어나 옮기고 싶다. 그러나 꿈에서 벗어나는 순간, 시는 증발하고 만다. 완벽하다는 느낌만 남는다. 나는 다시, 암담함과 죄책감과 대면해야 한다.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
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
호수의 몸 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 떠 있었지.
꼬리를 흔들며 갈퀴손으로
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
당신 마음이 너무 깊고 넓게 퍼져
난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
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
난 마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며
당신 마음 위에 뜨곤 했었지.
난 당신 마음 위에서 자지 못하고
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
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
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


―― 「오리」 전문

 

어느 날 꿈속에서 본 풍경을 옮긴 것이다. 한 번에 옮길 수 없는 것은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시를 쓰려고 하지 않는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쓰려고 들면 억지가 되는 것이다. 나의 억지를 독자들에게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좋았던 일을 생각하면 완주할 수 없다!”
옛날 육상부 선생님이 호통치고 있다.
“너는 너와 싸워 이겨야 한다!”


시 쓰기는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이다. 나는 나와 싸워 이겨야 한다. 기권하는 일은 나와, 목적의식과 타협하는 것이다.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 내가 가진 오감만으로, 끝내 나오지 않을 결승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윤학   1965년 충남 홍성 출생.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 『먼지의 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등이 있음.


술과 사랑
김    상    미

 

나는 중학교 때부터 술을 마셨다. 애주가인 아버지 덕에 우리 집에는 양주가 많았다. 조니 워커, 나폴레옹 꼬냑, 시바스 리갈, 발렌타인… 등등. 그리고 그런 양주병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예쁘고 세련돼 보여 어떤 맛일까, 무척 맛보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도록 시험공부를 하다가 재미가 없어 읽다 만 파스칼의 『팡세』를 펼쳤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빗소리가 났다. 가을비였다. 음산한 가을비.
나는 마루로 나가 찬장에서 아버지가 마시다 둔 양주병을 꺼내 한 잔 가득 따랐다. 그리고 그것에다 설탕을 탔다. 설탕을 타도 독주는 독주인지라 가슴속으로 흘러 들어온 술 방울은 확, 하고 내 몸에다 불꽃을 튀겼다. 마치 몸 안에서 불꽃놀이라도 벌어진 듯. 짧지만 아주 강렬한 느낌이었다. 파스칼이 셰익스피어처럼 삐딱해지는 것 같았다.


아, 이런 게 술의 맛이구나. 장미꽃 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는 것 같은. 
그 이후부터 나는 가끔씩 술을 마셨다. 때로는 커피나 홍차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마시기도 했다. 뜨겁고 강렬한 술맛을 배후에 깔고 읽는 세계 명작들은 영혼을 아주 빨리 달아오르게 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딱 한 잔씩만 마셨다. 한 잔 이상은 절대 연거푸 마시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오후, 파라다이스 두 병을 마시고 뻗어버렸다. 선배 오빠 세 명이 찾아와 대학 진학은 꼭 해야 한다며, 자신들이 등록금을 대주겠다며 어찌나 나를 협박(?)하던지 나도 모르게 연거푸 술잔을 비운 탓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대학 진학은 물론 그들의 프로포즈도 단호히 거절해 버렸다.


엉망으로 취해 있어도 별이 빛나는 밤은 아름답듯이 나 역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인위적으로 내 인생 궤도를 수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남들이 다 ‘순리’라고 부르는 그 길을 혹 내가 가지 못할지라도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우리가 늙어 죽기 전/ 알게 될 진실은 오직 그것뿐…”이라고 속삭이는 예이츠처럼 나 역시 술과 사랑을 선택하고 싶었다.  

 
이 세상엔 술도 못 마시고 사랑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술병에 코를 대고 맡아보라. 그 안에는 우리가 언젠가 어느 길목에서 보고 느끼고 만지다 잃어버린 냄새와 눈물과 아쉬움과 향수가 다 녹아들어 있다. 그 생의 비밀계단과 같은 술잔을 높이 들고 흔쾌히 술을 마시고 흔쾌히 술을 건네는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술병을 옆구리에 차고 아직도 이니스프리 섬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을 예이츠의 모습. 상상만 해도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해 보이는가.


물론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한 사람들은 불쾌하지만,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그러니 “…와서 맛보라/ 저절로 익은 것들은 무엇보다도 풍성하고 따뜻하다…/ 원하는 맛대로 나를 마셔라/ 저절로 익은 향기는 모두 에로스의 핏줄/ 상상할 수 없는 태고의 사랑이 내 속에 녹아 있다/ 마음껏 나를 마셔 나를 발견하고 나와 작별하라/ …”(나의 시 「나는 포도주」 중에서)


술과 사랑. 그리고 시. 나는 오늘도 그 위에서 아침을 맞고 황혼을 맞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99%의 유쾌한 마음과 절실한 마음으로 생의 경계를 넘어 내게로 한 발 두 발 다가오는 사랑이여, 너를 기다린다!

 

김상미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로 등단. 박인환 문학상 수상.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등이 있음.

 

이백, 두보와 포도주를 마시며 놀다
고    두    현

 

지난해 어느 봄날,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모처럼의 여우볕을 즐기던 중이었다. 바깥 풍경은 한가로웠고 급한 마감거리도 없었기 때문에 의자에 지긋이 기대어 책장을 넘기다가 ‘아하! 오늘 같은 봄밤에는 술 한 잔 하면서 이백과 두보에나 빠져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날 혼자 술을 마시며 천천히 시를 읽을 만한 데가 어디 있을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래! 민가다헌으로 가자!’ 하고는 길을 나섰다.
민가다헌은 운현궁 맞은편에 있는 전통가옥. 구한말 외교구락부 분위기의 제법 근사한 레스토랑인지라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는 곳이다. 아직 저녁식사 손님이 많아 빈 자리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테라스나 서재, 카페는 꽉 차 있었다. 할 수 없이 여러 개의 식탁이 두 줄로 늘어선 홀에 자리를 잡고 포도주 한 병을 땄다.


그러고는 읽다 만 『당시선唐詩選』을 한 페이지씩 넘기기 시작했다. 포도주 한 모금에 시 한 편씩이라…… 봄밤의 엄청난 사치였다. 삼십 수 쯤 읽었을 때 홀이 텅 비었다. 그러자 그 넓은 홀이 점차 꽃밭처럼 보였다. 밖을 내다보니 달빛도 교교했다. 나는 갑자기 봄 꽃밭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주선酒仙이 된 듯했다.


마침 그때 발견한 시가 바로 이백의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月下獨酌’였으니 1300년 전의 시선詩仙이 어쩌면 이리도 혜안을 지녔을꼬.


꽃밭에 앉아 한 병 술을/ 나 혼자서 기울인다./ 술잔 들어 달님 청하니/ 그림자 더불어 셋이로다./ 저 달은 본시 마실 줄 몰라/ 한낱 그림자만 나를 따른다./ 잠시 달과 그림자 데리고 모처럼 봄밤을 즐겨보리라./ 내가 노래하면 달은 나를 맴돌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따라 너울거린다./ 깨었을 때는 함께 어울리다가/ 취한 뒤에는 각기 따로 노는구나./ 영원토록 담담한 정을 맺어/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세.

아닌게아니라 하늘의 달과 나와 내 그림자가 더불어 술을 마시는 풍광은 얼큰했다. 이미 술이 반 병쯤 비었지만 마음만은 두주불사였고, 누구든 곁에 있으면 권커니 잣커니 하면서 주지酒池에 몸을 담그고 싶은 밤이었다.


두보의 「곡강曲江」을 읽고 나서는 혼자 마시는 게 너무 아쉬워졌다. 멀리 있는 문우에게 읽어주려고 휴대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도 이미 봄밤의 화사에 겨웠는지 전화기마저 꺼놓고 어딘가로 잠적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벗의 그림자만 데리고 앉아 홀로 소리 내어 시를 읽어줬다.

 

꽃잎 한 점 질 때마다 봄날이 줄어들거늘/ 바람에 만 점 잎이 흩날리니 시름겹도다./ 막 지려는 꽃이 눈에 스치는 것 잠시 바라보고/ 몸 상한다 하여 술 마시는 일 마다하지 않으리./ 강가 작은 집 비취새가 둥지 틀고/ 동산 옆 높은 묘에 기린 석상이 누워 있네./ 천천히 물리를 헤아리며 마음껏 즐겨야지/ 무엇하러 헛된 명예에 이 몸을 얽어매리요.

 

몇 번을 읊조리다 보니 술잔은 다 비었고 달도 이미 기울었다. 자정이 넘은 민가다헌의 불빛은 불콰했다. 이렇게 혼자 마시는 술이 얼마만인가. 이백과 두보와 더불어 탁주도 동동주도 아닌 포도주를 마시다니. 마음이 알싸해지면서 취기가 서서히 몰려왔다. 맑은 별이 몇 점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봄밤에는 왜 울고 싶어지는가’라며 술잔에 눈물을 떨구던 사람은 오늘밤 양수리의 다산 생가 앞 어디쯤에서 강물에 버들잎을 띄워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이렇게 시집 한 권 값의 세 배나 되는 술값을 아까워하지 않고 몇 년 만에 한 번 호사를 부리는 것도 그는 이해해줄 것이다. 누구보다 ‘꽃잎 한 점 질 때마다 줄어드는 봄밤의 슬픔’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옛사람과 마주 앉아 서역 만 리 건너 온 깊고도 부드러운 벨벳빛 와인의 미감을 나누는 순간, ‘흐르는 저 강물에게 물어보게. 우리들 석별의 정과 강줄기 중 어느 것이 더 기냐고’라던 이백의 시구까지 겹치던 그날은 더욱.


고두현   1963년 경남 남해 출생.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늦게 온 소포』.

 

출처, 네블, 스킨키드님


  

출처 : 휘수(徽隋)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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