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신풍속도 / 노정숙

칠부능선 2020. 10. 6. 21:33

신풍속도

노정숙

 

 

조카가 우리 부부를 집으로 초대했다. 제 형과 사촌 부부도 함께. 고모라고 해야 10년 남짓 차이나니 조카들 모임에 끼워준 거다. 뷔페음식으로 준비한 상차림은 산뜻하고 푸짐했다손님을 초대하면서 노동을 최소화한다. 집들이를 해도 식사는 식당에서 하고 다과만 집에서 하는 게 다반사다. 이건 오래된 신풍속이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음식점과 카페로 돌던 모임을 집에서 한다. 자발적으로 하지 못했던 소박한 삶으로 회귀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명절에나 만나게 되는 시어른도 부담스러운 세상에 조카와 조카며느리들도 나이가 드는 걸까. 휴식이 필요하다나, 그 휴식의 자리에 불러준 걸 보면 나는 시어른이 아닌 거다. 만만한 고모인 게 좋다. 앞으로 분기별로 돌아가며 집에서 모이기로 했다.

말끔하게 정리된 베란다 한가운데 킹벤자민 나무가 있다. 나무 가지에 강아지 사진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16년을 같이 살다 죽은 강아지 사랑이의 수목장이라고 한다. 내 눈엔 다 같은 사진인데 온갖 표정에 마음을 쏟으며 설명을 한다. 화단 양 옆에 있는 다육이나 다른 꽃나무들은 모두 사랑이 나무의 들러리 같다. 사랑을 듬뿍 받아서인지 푸르싱싱한 나뭇잎이 당당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조카들 대화중에는 개와 고양이 이야기가 많이 차지한다. 개를 자유롭게 키우기 위해 마당 있는 집을 장만한 장조카는 진돗개 세 마리와 고양이 네 마리를 키우고, 조카며느리는 집을 나설 때면 길고양이의 먹이를 챙겨들고 다닌단다. 조카의 꿈이 경제 활동에서 벗어나면, 산자락 하나 사서 버려진 개 50마리 정도에게 밥 주는 것이라고 한다. 하긴 우리 아들네도 개 한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를 키웠다. 며느리는 주 2회 길고양이 먹이를 주는 모임에 나간다고 한다. 딸네 집에도 길고양이가 따라와서 들였는데, 그 고양이는 우리가 가면 깊이 숨어서 안 나온다. 아직 불안하거나 도도한 습성이 있는 거다. 아들네 고양이는 우리에게 다가와서 부비는 걸 보면 개의 친근성을 익힌 고양이, 개냥이다.

며칠 전 탄천에서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강아지를 데리고 걷는 걸 보았다. 앞서 가던 할아버지 쪽으로 강아지가 바짝 가니 할아버지가 겁이 났는지 귀찮았는지 발로 차는 시늉을 하셨다.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우리 똘이 놀랬잖아요. 똘이한테 사과하세요하며 길을 막는다. 할아버지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한참 혀를 차다 가셨다. 산책하다 보면 개에게 알록달록 깔맞춤한 옷을 입히고, 마스크를 씌운 것을 본다. 비가 오면 비옷을 입히고, 때론 유모차에 떠억 앉아 있는 개도 만난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개를 만나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남의 집 아기에게 하듯 예쁘다며 인사도 건넨다.

영화 <내 어깨 위 고양이, >이 떠오른다.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노숙을 하던 청년이 길고양이를 만나면서 인생 전환을 맞는 실화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소통에 있는 듯하다. 말보다 진한 교류라고 할까. 그들은 서로의 마음과 상황을 인지한다는 믿음이 있다. 말 못하는 것들과의 유대가 애틋하다.

개와 고양이의 재롱을 보는 것보다 병 수발하는 대목에서 나는 귀를 더 세우게 된다. 측은지심을 바탕으로 한 생명 사랑이다. 우리 집 위층에 다리가 하나 없는 얼룩무늬 큰 개가 있다. 그 주인은 아침마다 운동을 시키며, 극진히 사랑을 쏟는다. 멀리서 바라보면 왠지 마음이 저릿해지며 그 분께 고개를 숙이게 된다.

조카들의 동물 사랑을 보니 이들이 나보다 마음 그릇이 큰 거다. 그러니 고모에게도 관심을 나누는 거 아닌가. 내게도 시고모님이 두 분 계시다. 나이 차이가 상당해서 정기 모임은 어림없지만, 안부 전화나 인사도 내가 할 때보다 받을 때가 더 많다. 사람살이에 여유롭지 못하니 동물 사랑까지는 언감생심이다.

집안에서 똥오줌을 누지 않는 개들이 있다. 개의 습성을 잃지 않은 영리한 개다. 주인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개를 위해 하루 한두 번 용변봉투를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가야 한다. 산책길에 많이 만나는 이 모습은 개가 주인을 운동시키는 건지도 모른다.

동물은 자신의 죽음을 안다고 한다. 죽음이 다가오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서 마지막을 홀로 맞이한다는데, 나는 걱정이 된다. 인간의 가족이 된 동물은 그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요즘 사람들이 병들면 호스를 주렁주렁 달고 연명하듯이 반려동물에게도 온갖 의료행위를 하며 연명시킨다. 많은 돈을 들이고 그 안타까운 시간을 겪는 과정은 가족과 같다. 아니, 집안에 들인 개의 수목장을 보니 피붙이에게보다 더 극진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거나 나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이들이 말하는 이 아이들 - 개나 고양이가 주는 기쁨을 모르고 사는 거다. 세상엔 내가 모르는 일이 참으로 많다.

 

 

  <수필과비평> 2020. 10 (통권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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