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반갑다, 은수야 / 노정숙

칠부능선 2020. 9. 8. 15:05

반갑다, 은수야

노정숙

 

 

세계 일주를 하고 온 마을버스 은수를 만났다.

오래전부터 50대가 되면 여행가의 길을 걷는 게 소원이던 임택 씨는 꿈을 이루기 위해 경제생활에 전념하면서 체력을 키우고, 영어를 준비했다. 평창동 언덕길을 헐떡이며 올라오는 마을버스, 좁고 가파른 길을 다니며 사람들을 큰길까지 데려다 준 다음 산동네로 되돌아오는 기껏 해야 2차선 도로를 달리는 종로12 마을버스의 인생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은수교통출신인 그에게 은수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넓은 세상으로 함께 나가기로 작정했다.

677일 동안 48개국을 다녀온 대견한 은수가 지금은 국내 오지를 다니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잠시 쉬다가 21차로 삼척 일대를 향한다. 마을버스, 세계를 가다라는 책으로 먼저 만나서인지 임택 작가와 은수는 구면 같았다. 둘 다 생각했던 것보다 젊은 모습이다.

나는 정원 10명의 귀한 자리를 하나 얻었다. 세계여행에서 그랬듯이 이번 여행도 계획 없는 것이 계획이다. 어디를 가서 무얼 보고 무얼 먹는다는 계획이 있는 점의 여행이 아니라 계획 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과정을 즐기는 선의 여행이라고 한다. 비가 와도 홍수가 나도 떠나며, 차가 서서 몇 시간 기다릴 수도 있고, 움직이지 못할 상황이 되면 어느 시골 처마에서 옥수수를 삶아 먹으며 있다가 온단다.

운전병 임택, 조수겸 재미장 김병목, 정규직 차장 곽숙경, 웃음충전소장 정경석 여성분들에게는 직책이 없는 남성 우월주의적 여행모임입니다. 여성들은 다음과 같은 수칙을 잘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여성이 지켜야 할 여행수칙 / 손끝 하나 햇볕에 노출하지 않기. 지난 조에서 설거지하려고 나서다가 퇴출당하신 분 있음.’ 떠나기 전에 받은 주의사항이다. 내 몸에 밴 무수리 습성을 단단히 눌러야 한다는 말이다. 책에서 본 것처럼 좌충우돌 펼치는 일들을 즐거움으로 누릴 마음을 다잡으며 실없이 웃음부터 나왔다.

마음먹기가 번개 같은 나는 이번에도 마음과 함께 몸이 나갔다. 아직 다리가 아닌 가슴이 떨리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은수와 눈을 맞춘다. 환한 초록색 몸체, 운전석 문에 태극기가 그려있고 그 옆에 길게 마을버스, 세계를 열다라는 멋진 작품이 새겨있다. 반대쪽 창에는 세계지도가 차분히 그려있다. 은수의 몸 안팎에 빼곡히 쓰인 글씨, 아는 언어와 모르는 언어 사이에 간격은 없다. ‘간다 간다 하더니 정말로 가실 줄이야. 역시 우리 아빠답다. 아빠 파이팅아들과 딸의 응원에 하트와 엄지 척을 더한다. 조지아어, 키릴어, 비온 뒤 지렁이 자국 같은 문자들, 나는 단숨에 문맹이 되었지만 그들의 고맙고 대견한 감정을 읽는다. 만국공통어인 그림 앞에서는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하고, 볼리비아에서 만난 수녀님의 평화기원과 강병남 시인의 축하시 신세계앞에서는 숙연해진다.

운전석 문을 여니 녹이 슬어 철판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갔고, 내가 앉은 차장 뒷자리 바닥에는 동전만 한 구멍이 뚫려있다. 그러나 은수는 겉모습과 달리 속은 탄탄하다. 60km로 제한된 마을버스의 시스템을 바꿔서 아우토반을 달렸다. 은수가 길 위에서 헉헉거리다 멈춰서면 언제나 천사가 나타난다. 소박한 사람 형상을 한 천사의 손을 거치면 은수는 힘을 얻어 다시 길을 달린다. 아픈 것을 고치고 바꾸면서 속이 더 젊어진다.

은수의 몸 사방에 ‘jump! new life’라고 쓴 말풍선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 기를 받아서 우리도 가는 곳마다 점프를 하며 인증샷을 남겼나보다. 그때마다 웃음이 팝콘처럼 튄다.

이번 여행의 호스트는 삼척의 하태성 시인이다. 오래전 수녀원이었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바꾸는 공사를 하고 있다. 정원에는 연못과 작은 꽃나무들이 자리를 잡았고, 1층은 시멘트 바닥에 건축자재들이 널려있지만 하 시인의 구상을 들으며 색다른 미술관 모습을 그려본다. 2층의 넓은 마룻바닥 가장자리에 텐트를 치고, 중앙에 즉석 식탁을 차리고 둘러앉았다.

첫날 빔프로젝트가 고장 나는 바람에 하 시인의 부인인 서민정 락페라 가수의 즉석공연으로 귀 호사를 했다. 호스트가 준비한 문어와 골뱅이, 제철인 민어회와 주변에서 채취한 오디, 블루베리, 살구로 입 호사까지 했다.

둘째 날은 빔을 고쳐서 이번 주제인 남미이야기를 들었다. 우유니사막에서 모래폭풍을 만난 은수의 모습을 보며 책 바깥의 우여곡절에 폭소와 함께 애틋한 마음이 오갔다. 임택 작가의 무한긍정과 전천후 친화력은 여행의 강점이다. 30시간 이상 비행해야 갈 수 있는 남미가 이웃 마을처럼 친숙하게 다가온다.

삼척 몇 곳을 다녔는데 부러 좁은 길을 택해서 은수의 이마로 나뭇가지를 헤친다. 이들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밀고 나아가는 추진 장치를 장착한 듯하다. 대장에게 은수는 피붙이 같은 느낌이 아닐까. 그 무언의 연대가 극진하다.

두 밤을 기거한 공사 중인 미술관은 화장실이 1층에 하나 있고, 샤워장은 물론 세면대, 싱크대도 없다. 그럼에도 잘 먹고 잘 자고 논 것은 배려와 봉사심 많은 일행 덕분이다. 여행 고수들의 넉살도 유쾌했다.

돌아오는 날 차로 갈 수 있는 최고 높은 곳인 만항재를 은수는 거뜬히 올랐다. 카파도키아와 안데스산맥을 넘은 전력을 떠올렸다. 겹겹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 앞에 은수를 가까이 세우고 계단 난간을 사다리 삼아 지붕 위에 올라갔다. 우리는 버스 위에서 하늘을 나는 모습을 남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삶을 향해 점프, 점프를 했다.

창궐하고 있는 지상의 근심과 시름을 누르고 뛰고 또 뛴다. 길 위에서 마음은 늘 희망 쪽으로 열린다.

겉은 늙고 상처투성이지만 속이 튼실한 은수를 보며 힘을 얻는다. 고맙다, 은수야.

 

<에세이문학> 2020 가을호 (통권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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