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열반지에서 / 노정숙

칠부능선 2020. 8. 29. 13:07

 

열반지에서 

노정숙

 

 

열반지에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인천에서 홍콩을 거쳐 뉴델리로, 뉴델리에서 하루를 어정거리고 콜카타로 날아갔다. 콜카타에서 한없이 연착되는 기차를 타고 부처님의 득도지인 보드가야를 돌아보고, 흙먼지 날리는 버스를 타고 터만 남은 나란다 대승불교대학을 지나, 죽림정사와 영취산을 돌아 쿠시나가르에 닿았다.

부처님의 행적을 더듬으며 열반지에 다다르니 그동안 다닌 곳 중에 가장 소박하다. 가난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열반하신 뜻은 보이는 겉모습에 얽매이지 말라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상아빛 둥근 모양의 열반당과 뒤편에 대열반탑이 있다. 열반당에 모셔져 있는 열반상은 히라냐바티 강바닥에서 발견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미얀마 불자들이 금칠을 했고 그들이 관리하고 있다.

오른손을 얼굴에 대고 모로 누운 몸에는 노란 빛깔 사리가 덮여 있다. 열반하신 부처님의 발을 만지려면 1불을 내야한다. 옆으로 모은 두 발 아래에는 각국의 지폐와 동전이 쌓여있다. 머리를 숙이고 부처님 발바닥을 만진다. 거대한 발바닥은 미동도 없고 내 손에 금박이 잔뜩 묻어왔다. 금빛을 보니 모든 걸 태우는 불꽃 심지가 떠오른다.

수행이 높은 스님들이 앉아서 입적하는 좌탈이나 서서 입적하는 입탈에 대한 글을 읽을 때는 감히 접할 수 없는 경지라서인지 불편했는데, 이번 부처님의 열반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열반상 옆에 세 사람이 조각되어 있다. 등을 곧게 세우고 앉아 수행에 든 모습, 이별 앞에서 슬픔을 참느라 고뇌에 찬 모습, 애통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행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각기 다른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슬픔을 추스르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충격을 주는 돌연한 죽음 앞에서 열반경을 떠올린다. ‘만약 죄를 지었으면 감추지 말아야 한다. 감추지 않으면 죄가 가벼워지고 부끄러움을 느끼면 그 죄악 자체가 소멸돼 버리고 만다고 한 걸 보면 그때도 죄를 숨기고자 하는 죽음이 있었는지. 늙음과 병듦, 죽음이 세상에 보낸 세 명의 천사라는 걸 언제쯤 깨닫게 될까. 늙고 병들기 전에 맞닥뜨리는 죽음은 황망하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존재의 자각이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선과 악이 늘 줄다리기를 한다. 모든 중생 중에 인간은 유일하게 육신보다 감정을 앞에 두고 산다. 육신이 배와 같고 감정은 물과 같아서 출렁이는 물길로 멀쩡한 배를 가라앉히고 뒤집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부처님의 득도지인 보드가야에서는 신발을 맡기고 맨발로 걷는다. 흙과 대리석에 닿는 촉감이 시원하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오체투지를 하고, 명상에 잠겨있다. 하늘을 찌르는 대탑보다 사람 물결에 눈길이 간다. 주황색, 흰색, 붉은색 가사를 입은 스님들끼리 모여 종을 치며 게송을 읊는다. 사리로 둘둘 감은 여자들도 연신 손을 모은다. 작고 작은 나를 바로 알게 해주십사고 나도 손을 모은다. 관념으로만 맴도는 무념무상, 모은 손이 민망하다.

성스러운 곳 여기저기 개들이 누워있어도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는다. 모든 숨탄것들을 중생이라 이르며 같은 값으로 여기기 때문일까. 발복을 비는 건지, 속죄를 바라는지 무언가를 빌고 또 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편안해 보이는 건 견공들이다.

득도를 하거나 하지 못하거나 죽음은 탄생과 함께 예정되어 있다. 나는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이런 건방진 말을 함부로 하던 때가 있었다. 젊음을 누리지 못하고 팍팍하게 여기던 때는 예정된 죽음이 일말의 위로가 되기도 했다. 태어남이 공평하지 않듯,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르는 죽음도 공평하지는 않다. 우리의 삶은 질과 양이 비례하지 않는다. 어쩌다 드물게 자신이 죽는 날을 예견한 사람을 보면 경외감을 느낀다.

사람이 죽는다고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매미가 허물을 벗듯 이승의 낡은 옷을 벗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다고 한다. 이승에서 살아온 모습의 업에 따라 어떤 옷을 입을지가 결정된다고 하니 여전히 삶은 녹록지 않다.

부처님은 원인 없는 결과가 없으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라고 하셨지만, 살다보니 노력 보다 어떤 거대한 힘이 함께 해야 무엇이건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7년 전 두 번째 인도여행도 내겐 우연한 행운이었다. 바이러스의 창궐로 세계의 문이 닫힌 지금은 다음 인도여행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자비와 은총이 함께 해야 가능하다.

고뇌와 번뇌에서 해방이라니 어림없다. 번뇌와 고뇌를 지렛대 삼아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간다. 애쓰지 않아도 살아있는 것은 모두 땅으로 돌아간다. 누구도 무엇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이 등불이니 자신을 믿으라는 마지막 말씀에 힘을 얻는다.

 

<불교평론> 2020 가을호 (통권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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