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2020, 재난일기 / 노정숙

칠부능선 2020. 6. 4. 21:49

 

2020, 재난 일기

 

노정숙

 

 

 

27

딸의 성당봉사 교사연수 23일이 연기되었다. 그때 손자들을 봐주기로 했는데 아쉽다. 감염병 위기경보, 경계 단계다.

 

212

친구 부부와 오래전에 예약해 둔 여명의 눈동자를 보러갔다. 식당과 카페가 한산하다. 자연스럽게 거리두기가 되었다. 세종문화회관은 한 쪽 입구만 열고, 손 소독제와 마스크를 준비해두었다. 객석이 절반 정도 찼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신탁통치, 한국전쟁 직후의 격변기를 치열하게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다. 역사의 흐름, 그 앞장에 선 사람은 역류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기립박수를 받을 만했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19’로 죽은 사람은 없다. 새롭고 강한 독감이 아닌가. 미래의 전쟁은 바이러스 전쟁이라고 예고했다. 감염된 자의 사투와 감염되지 않은 자의 사투, 그렇더라도 인류가 멸종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대책 없는 낙관이 내 지병이다.

 

213

월하오작月下五酌비정기적으로 문우 다섯이 만난다.

거리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과 안 쓴 사람의 비율이 비슷했다. 밀폐된 공간이 아닐 때는 심하게 긴장할 필요는 없을 듯. 오후 4, 어정쩡한 시간의 식당은 한가로웠다. 조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모임의 이름값을 했다. 좀 떨어져 앉아서 속엣말까지 나누었다.

   

223

성남민예총 간부 워크숍

지난주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코로나19가 대구 신천지교회로 인해 창궐했다. 불안지수가 높아가고 있는 터라 조심스러운 모임이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한 자리 건너 앉아서 올해 행사에 대한 각 분과별 준비회의를 했다.

오늘의 수확 중 하나는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보고 토론을 한 것이다. 88세 아네스 바르다와 33세 사진작가 JR이 감독, 주연한 다큐다. 자연, 노동,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소외된 곳의 사람과 풍경에 경의를 보내는 메지지가 스며있다. 두 예술가는 카메라 트럭을 타고 프랑스 지방과 해안도로를 달린다. 떨어져 앉은 뒷모습과 느린 대화, 말을 건네는 자연 배경이 멋지다.

 마음의 거리와 몸의 거리를 생각하며, 사회적 거리두기와도 잘 맞는다.

 

226

모든 문화강좌와 스포츠강습이 휴강되었다. 오래 다닌 수필반과 이제 시작한 라인댄스도 발이 묶였다. 사태가 좀 심각하게 다가온다.

졸지에 수입이 없어진 사람이 많다. 딸도 그 중 하나다. 보편적 기본소득과 기초생활자의 재난수당 이야기가 나온다.

 

227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시인회의모임이 취소되었다. 그래, 마음을 느긋하게 먹자. 다음 달이면 만나겠지. 재난 중에 간절함을 담아, 영감靈感님의 기척을 기다려본다. 재난 중에도 수확을 바라는 이기심이라니.

 

228

‘The 수필선정모임, 3개월에 한 번 하는 정기모임이 취소되었다. 크게 건의할 것이 없으면서 답답한 마음이 든다.

대구는 지금 집밖을 못 나오고 먹을 것도 없다며 살려달라는 문자가 떴다. ‘의사·간호사 등 490명이 대구로 간다는 코로나19 의료봉사 지원뉴스를 금방 봤는데. 서로 가짜뉴스라며 자신이 믿고 싶은 쪽으로 기운다.

대구에 사는 문우 C에게 전화를 했다. 마스크 쓰고 한산해진 동네를 산책 중이라고 한다. 식구들이 집에 있으니 밥 세끼 차리는 일이 힘들다고 한다. 다 지나가겠지요.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약국 앞에 마스크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섰다. 매일 출근하는 사람들은 정말 힘들겠다. 내 마스크는 빨아 쓰는 것으로 하고, 미세먼지용 마스크도 있으니 급한 사람을 위해 마스크 사는 일은 미루기로 한다.

 

229

이종동생이 픽업하러 왔다. 승용차를 이용하여 이모 댁으로 향하는 중, 도경계를 넘을 때마다 문자가 온다.

 

- 성남시 (코로나19 확진자 2명 추가 발생 (3) 추후 이동 동선 공지 예정)

- 평택시 (관내 마스크 판매계획 현항)

- 충청남도청 (코로나19 감염 방지를 위해 집단시설 모임, 운동센터 등 밀폐된 공간에서의 실내활동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남원시 (코로나 확진자 없음을 알려드림. 발열, 기침 등 호흡기 증상이 있는 분은 보건소 상담바랍니다.)

- 전라북도청 (도내 확진자의 방문 장소 소독을 모두 마쳤습니다. 소독 후 안전하므로 도민들의 응원 부탁드립니다.)

- 거창군청 (1인당 2매 마스크 배부 예정이었으나, 정부의 마스크 공적판매 방침으로 변경되었음을 양해바랍니다.)

 

스마트폰은 위치추적기가 달린 개목걸이다. 확진자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의 동선이 드러난다. 위험을 막는 보호막이면서도 개인정보 노출이다. 이 가차 없는 투명성, 정보력이 논란이 되기도 한다. 은밀히 움직일 일 없음이 다행인가.

혼자 계신 이모는 반가워 얼굴이 반짝거린다. 동생은 들어서자마자 이모가 준비해 둔 밥상을 차린다. 냉이나물, 우엉조림, 고사리나물, 씀바귀나물. 조기구이. , , 곶감을 넣은 찰밥, 밥만 먹어도 꿀맛이다.

이모는 요즘 교회를 못 가서 갑갑하다고 하신다. 차를 타고 나가 상림 숲을 걸었다. 가는 비가 오니 나무들이 간지럼을 타는지 쏘삭거린다. 멀리 사람이 한둘 보이는데 모두 마스크를 썼다. 이 청정지역을 맘껏 호흡하지 못하는 마스크가 장애물이다. 숲을 한 바퀴 걷고 돌아와 먼먼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 품인 양 단잠을 잤다.

 

311

크고 작은 모임이 모두 취소, 연기되었다.

더 많이 읽으며 혼자 놀아야 한다. 한때는 열렬히 소망했던 시간이 아닌가.

며칠 걸려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을 읽었다. 역사학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철학, 신학, 교육을 아우르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수정하고 개편되지만 큰 틀은 바뀌지 않는다 ‘왕조는 어떻게 붕괴하는가’,  ‘도회문화는 문명의 절정이자 성장의 종말이며 퇴락의 징후이다’ 14세기 당대를 넘어서 지금도 유효하다. 이 재난과도 겹쳐진다. 문명이라고 말하는 이기가 과하면 탈이 난다.

 

323

애덤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읽었다.

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 잠들다지구에서 67년을 살다간 그의 묘비명를 보면 자신을 유명하게 한 국부론보다 도덕감정론을 더 아꼈나 보다. 이 책은 오랫동안 침대에서 함께 기거했다. 수면유도용이 되기도 하고, 한밤중에 잠이 깨면 스탠드를 켜고 읽기도 했다. 2세기가 넘는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공감과 동류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감정을 분석하면서 간간이 드러나는 시니컬한 눈길과 역설이 재미있다.

우주만물은 신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그 후는 독자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시계를 만든 자와 시간의 관계처럼. 이 지구는 신이 손을 놓아버려서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것인지, 인간 스스로 신이 되려는 만행의 경종인지. 그럼에도 인간은 재난에서 가르침을 건져 올린다.

 

41

친구들 카톡이 요란하다. K는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화장지 36롤을 부치는 데 21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 우체국에 가니 비행기가 잘 뜨지 않아 샌프란시스코까지 2~3주 걸린다고 해서 미주전문 익스프레스에 가서 부쳤단다. 마스크는 따로 부쳐야 하고 한 달에 8, 그것도 부모자식 관계만 보낼 수 있단다.

캐나다에 사는 친구는 공원이며 놀이터, 주차장에 테이프를 감아놓아서 공포분위기란다. 확진자의 동선을 확인할 수 없는 궁여지책이다. 심약한 그는 밥맛도 잃고 불안에 떨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가 공항을 폐쇄하고, 거리는 봉쇄하고, 슈퍼마켓은 비어있다는 뉴스를 보니 기가 막힌다. 미국과 유럽이 더 이상 우리가 선망하던 선진국이 아니다. ‘글로벌 리더 미국은 낯 뜨거운 어린 짓을 해대고, ‘선진국 유럽도 우왕좌왕한다. ‘경제대국 일본도 방호복이 부족해서 교사들이 비닐 쓰레기봉투를 오려서 병원에 보내고, 시민들에게 방호복 대용으로 입을 비옷을 기증해주길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어려움 앞에서 더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고, 질서를 지키고, 봉사에 나서는 모습을 흔하게 본다.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문화저력을 재발견한다.

 

410 

21대 국회의원 사전투표 첫날, 모두 마스크를 하고 투표장 입구에서 열 체크를 하고 손 소독제를 사용하고 비닐장갑을 낀다. 마스크를 잠깐 내리고 본인확인을 하고 두 장의 투표용지를 받는다. 투표를 한 후 함에 넣고, 1m 거리를 유지하며 비닐장갑을 벗고 나온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세계가 지켜본다는 생각이 든다.

나온 김에 어머니와 엄마의 납골묘에 다녀왔다. 원래도 조용하던 곳이니, 멀리 한두 명 보이고 한가롭다. 꽃나무가 지천인 산과 들엔 봄이 가득하다.

요양원에 계신 아버님 면회도 절대사절이다.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영양제를 공급하고 있다는 문자가 온다.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나의 내일이다.

봄바람에 꽃비가 눈처럼 날린다. 언제쯤 저렇게 가뿐해질까.

 

419

제주에 사는 친구 딸 결혼식에 다녀왔다.

공항에서부터 바람이 먼저 반긴다. 제주의 확진자 13명은 모두 육지에 다녀온 사람이고 이곳은 공기가 좋아 전염되지 않는다며 자랑한다.

코로나 19는 결혼식 풍속도 바꿔놓았다. 신부가 선생인데 학생들이 집에서 축하영상을 만들었다. 보컬도 각자 연주하고, 동영상을 통해 전하는 인사말이 뭉클했다. 이 재난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은 포기하고 얼른 돌아왔다.

 

4월 21

발달한 문명은 바이러스를 삽시에 확산시켰다. 재앙은 한 나라의 일이 아니라 전 세계의 고통으로 번져,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알게 했다. 국경을 넘나드는 바이러스 때문에 나라마다 자국민 보호를 우선한다며 서둘러 공항을 폐쇄하고 민낯을 드러냈다.

세계의 공장 절반 이상이 멈추고 자동차 배기가스가 줄어드니 하늘이 맑아졌다. 재난 이전과 이후, 우리의 삶이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분분하다. 인류 역사에 굵은 줄을 더할 코로나19’, 이로 인해 디지털혁명 시대의 신인류 - 포노 사피엔스가 지배하는 세상이 다가옴을 느낀다. 생각의 표준이 바뀔 듯하다.

밖으로 향한 문이 좁아지면 안에서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작아져도 괜찮은, 아니 작아져서 더 넉넉한 회귀를 생각해 본다.

 

 

 

  <수필과비평> 6월호. 통권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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