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나를 받아주세요 / 노정숙

칠부능선 2020. 11. 25. 19:29

<자선自選 수필>

 

                                                     나를 받아주세요

 

노정숙

elisa8099@hanmail.net

 

 

나 삼문 벼랑에 섰습니다.

내가 먼 곳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 중에는 왜 하필 바쁜 시간에 부고訃告냐며 투덜대는 이도 있을 테고, 잠시 추억을 더듬으며 가슴이 저릴 사람도 어쩌다 있겠지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철든 후 내 생은 눈치보기의 연속이었지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어림없는 일이지요.

내가 떠나는 자리를 찾은 벗에게 두 번의 절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슬쩍 웃고 있을 내 영정사진을 보며 혀를 차는 대신 함께 씨익 웃어주길 바랍니다. 축제 같은 이별식이면 더 좋겠습니다. 잔잔하게 읊조리는 연도나 성가가 들린다면 황송하면서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병 없이 앓는 날이 길어지면 장롱이며 서랍 속에 남아있는 것들을 내보내야 하지요. 산 사람의 물건은 숨이 붙어 있지만, 죽은 자의 것은 주인이 먼 곳을 떠나는 순간 함께 숨을 놓지요. 책이며 옷가지며 쓸 만한 것은 서둘러 새 주인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오래 쓴 물건에도 혼이 깃든다는 것을 느끼거든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새 주인과 정이 들 시간이 필요하지요.

말년에 어머니는 계절이 바뀌면 성급하게 없앤 물건들을 다시 장만해야 했지요. 그때는 필요한 것이래야 보온을 위한 옷가지 정도였지만요. 지나치게 깔끔했던 어머니의 뒤처리를 보며 눈 흘기던 게 어제일 같습니다.

내가 어릴 때 우리집은 자주 시루떡을 했는데 네모반듯한 것은 모두 이웃에 나누어 주고 식구들은 귀퉁이 세모 조각만 먹었지요. 어머니 심부름으로 음식바구니를 들고 동네를 도는 일은 재미있었지요. 그러나 이런 어머니가 마냥 좋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내 살림을 하게 되면 나만을 위해 살리라 다짐했지요. 그것이 더 어려운 일인지는 나중에 알았지만요.

좋은 것을 다 나누어주던 어머니는 마지막 육신까지 가톨릭의과대학에 기증을 했습니다. 어머니의 유품은 정리할 것도 없었지요. 내게 남은 것은 어머니가 손수 짠 삼베 홑이불과 치자 물들인 명주 목도리가 고작입니다. 나 역시 자식에게 물려줄 게 변변찮아 눈 흘김 당할 건 뻔합니다.

받아주세요. 숨을 놓은 내 육신을 바칩니다. 살아서도 한가롭지 않은 내 삶은 죽어서도 분주할 것 같습니다. 많이 혹사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쓸 만한 두 눈을 굳어지기 전에 누군가에게 얼른 주겠습니다. 무방비로 열어두었던 두 귀는 지니고 가렵니다. 늘 열어 놓았지만 제 몫을 했는지는 자신 없습니다. 다만 순명을 다하는 귀의 자세를 깊이 새기기 위해서 곱게 거두어 가려합니다.

다 쓰지 못한 뇌는 그대로 반납합니다. 한 번도 명석한 적 없이 궁리만 무성했지요. 제대로 건져 올린 건 없지만 참으로 빡센 노동을 했습니다. 때때로 머리와 엇갈리는 의견에도 잘 버텨준 가슴이 대견합니다.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어깨가 단단하게 굳었습니다. 자주 칭얼대던 오른쪽 어깨에게 가장 미안합니다. 내 등뼈는 일찍이 위엄을 버렸습니다. 심한 스트레스와 쌓인 피로로 근육이 꼬였다고 하네요. 힘에 부친 맏며느리질을 오래하면서 저절로 비굴해졌습니다.

부실한 대로 기꺼운 머리를 겨우 얹고 있는 긴 목은 늘 기울어 있었지요. 마음씨 후한 선배는 내 자세를 보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겸손의 표징이라고 했지만 실은 민망한 얘기지요. 무시로 들끓는 속내를 들키지 않았음에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매스라고하나요 그 벼린 칼로 가슴을 열 때 조심하세요. 늘 대책 없이 두근대던 심장 동네에서 아우성이 들릴지도 모르니까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웅얼거림이 가득할 거예요. 그곳은 아직 연륜이 만들어 준 빗금을 새기지 못했거든요. 수많은 잡것들을 걸러내던 콩팥이며, 쉬지 않고 흐르던 대동맥이며 뇌동정맥은 오래된 고단함에서 비로소 해방될 것입니다.

포르말린에 잠겨 팅팅 불은 나의 몸은 몇 번 더 남은 할 일을 위해 대기할 것입니다. 끝으로 신참 의학도를 맞을 것입니다. 실습실 해부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뼈와 내장이 무사히 해체되고 그들에게 오래 기억되어, 그들이 펼쳐갈 의로운 일에 쓰이기를 바랍니다. 흩어진 사이사이에서 흘러나올 내 한숨과 눈물이 마지막 부끄러움을 씻어주길 꿈꿉니다.

저기, 삼문 너머 어머니의 모습이 환합니다.

 

 

 

현대수필봄호 말 한마디로 등단 (2000)

성남 문예아카데미 원장

성남문예비평지 편집위원

분당수필문학회, 시인회의 회원

현대수필자문위원

5회 한국산문문학상, 9회 구름카페문학상 수상

수필집 흐름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

한눈팔기

아포리즘 에세이 바람, 바람(2013년 우수도서 선정)

 

- <選선수필> 2020 겨울호 통권 69호

 

 

 

 

 

 

 

 

 

<자선自選 수필> 청탁을 받고 생각했다. 나도 기어이 연식으로 '원로'에 들어간다는 말이지.

신작쓰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좋아했는데 그게 아닌거다. 스스로 선택해서 내놓을 만한 글이 있던가. 주춤, 했다. 

스스로 뽑을만한 작품다운 작품이 몇이나 있는가. 

다시, 나를 점검하는 계기로 삼는다. 

 

'수필. 시 -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무심히 / 노정숙  (0) 2020.12.12
시간의 힘 / 노정숙  (0) 2020.12.02
나를 받아주세요 / 노정숙  (0) 2020.11.25
의문과 확신 사이 / 노정숙  (0) 2020.11.18
신풍속도 / 노정숙  (0) 2020.10.06
이별의 무게 / 노정숙  (0) 2020.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