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어느 날 무심히 / 노정숙

칠부능선 2020. 12. 12. 22:52

어느 날 무심히 

노정숙

 

 

화원에서 남천을 데려왔다.

대나무풍으로 미끈한 일곱 가닥 줄기에 적당히 뻗은 이파리가 날렵하다. 동양화를 보는 듯, 한가로워 자주 눈길을 주었는데, 우리집에 온 후로 새로 난 잎이 넙데데하게 자란다. 크지 않은 분재 화분에서 마디게 자라는 성질을 잊어버린 듯하다. 튼실하게 자란 새잎이 원래 있던 잎과 부조화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 뻗는다고 마구잡이로 자라도 자르거나 휠 줄 모르는 주인이란 걸 알았나 보다.

그 화분에는 빨간 버섯도 살다 가고, 화분 위로 살짝 나온 뿌리에 비로드 같은 이끼도 자란다. 어른 허리께 넘는 남천은 줄줄이 피는 하얀 꽃도 건너뛰고, 가을이 깊었는데도 단풍 들 기미도 없이 푸른 새순들만 올라온다. 움트는 연록 잎은 어린 새가 먹이를 향해 부리를 벌리는 모양이다. 늦되는 게 뒷북 잘 치는 나를 닮아간다. 귀한 것도 우리집에 오면 수수해진다.

남천의 꽃말이 전화위복이라니 이 시대에 위로가 된다. 재난 중에 있을 때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이 고통스럽지만, 예기치 않은 행운도 예고 없이 온다. 복과 화의 줄다리기가 삶이다. 모임 금지, 사람과 거리두기 이 불편한 일들이 익숙해질 무렵에야 팬데믹이 끝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듯하다. 기약 없는 자발적 자가 격리의 시간에 확 쪄버린 몸무게가 쉬이 원위치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코로나19 이전과 같은 삶은 요원하다.

촛불 시위나 대규모 공연으로 인류사 이래 많은 사람이 모였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어느 때보다 각자 따로 사는 시대가 되었다. ‘함께홀로가 어우러져 조화와 부조화를 넘나든다. 마주보기 이파리처럼 나는 아직 사람과 함께하는 게 익숙하고 안심이 되는데, 앞으로는 더 많은 시간을 홀로 놀아야 한다. 실컷 책을 읽고, 넷플릭스로 맘껏 영화를 보는 중에도 뭔가 허전하다. 그래서인지 식물에게 눈길이 간다.

식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데, 우리집 베란다에는 푸른 것들이 지지부진하게 겨우 명을 잇고 있다. 영양제는커녕 분갈이도 해준 적 없고, 베란다를 청소하며 물을 줄 뿐이다. 그중에 맹렬한 것은 새로 꽃대를 올려서 나를 미안스럽게 한다. 이들을 세심한 손길로 보살피지 못하면서 나는 통 큰 척, 태평 농법이라고 한다. 너무 자주 사랑을 퍼부어 짓무르게 하거나 너무 오래 참아서 말라죽게 할 수도 있다. 묶이지 않으면서 좋아하고 존재 자체로 마음이 환해지는, 이제야말로 제대로 태평 농법을 발휘할 때다.

꽃은 생식기를 원색적으로 내보이며 우리를 유혹한다. 그 유혹을 누구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잠시 황홀한 꽃보다 담담한 나무가 좋다. 꽃도 잎도 떨군 채 앙상한 줄기로 겨울을 나는 나무에게서 겨울산에서 느끼는 경외감마저 떠올린다.

여리게 전해오는 생명 기운, 모든 숨탄것들의 소망은 생을 이어가는 것이다. 속은 자주 시끄러워도 겉으로 무던하게 살아온 내 생도 격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 식물의 속성을 닮았다. 말없는 것들과의 교류는 너그럽다. 어떤 오독도 가능하기에 내 기분대로 해석한다. 대지를 잃은 화분 속 식물이야말로 셀프 위로로 맞춤하다. 되돌아올 화살은 아우성 없는 자책일 테니 다행이다.

전화위복이라는 꽃말 때문인지 남천이 늠름해 보인다. 실망할 일이 생겼을 때, 희망이 예비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전화위복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낸 사람의 몫이다.

돌아보니 내가 예견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반년 전에 예약해둔 페로 제도 여행이 무산되고, 요양원에 계시던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이어서 이모부와 외삼촌도 이 비대면 시기에 돌아가셨다. 재난 중에 온 피해가 크지만, 재난 후에 나아질 것을 애써 찾아본다.

복이나 화가 내 노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일찍이 알았으나 허탈하지는 않다. 높은 뜻이나 소망을 가지고 전력투구하지 못했으니 아쉬울 건 없다. 가붓한 내 자리가 기껍다.

오늘도 무심히 남천을 바라본다.

 

<계간수필>2020 겨울호 (통권 102호)

'수필. 시 -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의오늘> 시 2편  (0) 2021.06.03
그 후, 15년  (0) 2021.03.16
시간의 힘 / 노정숙  (0) 2020.12.02
나를 받아주세요 / 노정숙  (0) 2020.11.25
의문과 확신 사이 / 노정숙  (0) 2020.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