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시간의 힘 / 노정숙

칠부능선 2020. 12. 2. 14:47

 

시간의 힘 

노정숙

 

 

시간의 바람 앞에 흔들리던 촛불이 꺼졌다.

아버님께서 요양원 생활이 1년도 안 되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 중환자실을 몇 번 드나들었지만 그때마다 바로 회복하셨고, 그날도 아침식사를 조금 하셨다는데불효막심이다.

80세 넘도록 오토바이를 타신 아버님은 모든 것을 말로 전하면 즉시 이루어졌다. 말년에는 청력이 떨어져 글로 전하기도 했지만, 어떤 일에도 당신이 우선인 모습으로 94년의 생을 마치셨다. 근엄했던 삶에 비해 죽음의 의식은 간결하고도 순조로웠다. 한줌 재가 되는 과정도 디지털 화면의 숫자가 조용히 알려줬다.

아버님을 모시고 간 첫 번째 병원 응급실에서 하시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사후에 대한 당부 말씀이었다. 얼른 휴대폰을 꺼내 녹음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 , 의료기구의 소리가 배경음이 되어 아날로그 시대의 종언인 양 마음이 아득해진다. 그럼에도 아날로그 회로에는 숫자로 표시할 수 없는 인간적인 향취가 있다. 때때로 쿨렁이는 감정과 꼭꼭 씹으며 느끼는 미각처럼 포기할 수 없는 감각이 그것이다.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 세대다. 이어령 선생이 역설한 디지털공동체와 식문화의 아날로그 공동체를 이어주는 디지로그세대인 셈이다.

께 살 때는 몰랐는데, 아버님이 병원 밥을 못 드시는 걸 보니 유독 먹는 것에 예민하셨던 거다. 먹는 것에 의미가 크고 먹는 일 자체가 중한 일이었다.

지구상에 7천여 종의 언어가 있다는데 나이를 밥처럼 먹는다고 하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돈을 떼어먹고 욕도 얻어먹고 때로는 챔피언도 먹는다. 세계가 한 점 잃었다고 하는 축구 경기에서도 우리는 한 골 먹었다고 한다. 마음도 먹는다고 하며, 소통의 장에서는 말이 먹힌다 안 먹힌다고 한다. 모든 비유에서 먹는다는 말은 절절하다.

디지털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씹는 미각은 재현할 수 없다.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누구에게나 준엄한 일이다. 아날로그 세대는 밥벌이의 지겨움을 기꺼이 감당했지만 디지털 세대는 밥벌이보다 좋아하는 것을 먼저 추구한다. 가장이 되는 것도 어머니가 되는 일도 필수가 아닌 선택이며 밥을 가볍게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말은커녕 겨우 앉는 아기가 스마트폰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손가락으로 쓱쓱 밀며 흥미 있는 지점에 멈춰 까르르 웃는다. 손자가 4살 때, 외출한 엄마가 어디만큼 오는지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검색해보라고 했다. 11살이 된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학교와 학원 공부를 하고, 멀리 있는 친구와 게임에 빠지기도 한다.

스마트폰이 만들어낸 신인류, 이들은 티비보다 유튜브를 보고, 오프라인 시장보다 온라인에서 쇼핑한다. 한 번의 클릭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신인류의 선택에 의해 부가 이동한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지식정보 산업은 혁명을 이루었고, 이제 속도를 더해 사이버와 현실을 융합하려 한다. 중국은 수년 전부터 모바일 결제를 일상화해서 현금 없는 사회가 되었다. 거지도 깡통에 QR코드를 달고 있다니 기가 막힌다.

신인류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으로 소통하며 자신을 표현하고, 실시간 SNS로 세계 인류와 교감을 나눈다. 오래전부터 인간의 이기적 유전자는 자기 종의 번식을 위해, 정보를 복제하고 확산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그 문화를 누리기 위해서 갖춰야 할 조건들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중간 세대인 나는 변화의 광속에 숨이 차다.

지난달에 제주에서 친구의 딸 결혼식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결제를 하고 스마트폰에 모바일 탑승권을 다운받아 다녀왔다. 공항버스도 휴대폰으로 예약하니 할인까지 된다. 단순한 이런 일도 버벅거리며 겨우 했지만, 비대면으로 처리하는 것이 편하고 경제적이란 걸 경험했다. 이런 신기술을 기반으로 우리는 전 세계가 코로나19 - 팬데믹에 빠진 오늘날, 정보를 공유하면서 배려와 봉사심을 발휘하여, 우리도 몰랐던 새로운 문화국가로 떠올랐다.

전쟁을 겪은 아날로그 세대가 그들이 이루어낸 필사의 의지와 강건한 정신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려면 디지털방식을 통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생각과 소통방식이 다른, 손자와 증손자의 간극. 그 가운데 낀 세대로서 나는 양극을 잇는 궁리를 해본다.

아버님이 요양병원에 계실 때, 새벽에 급히 오라고 전화를 하셨다. 불안한 마음으로 달려가니 외롭다고 하신다. 아침저녁으로 드나들던 때였는데 참으로 면구스러웠다. 꼿꼿했던 아버님의 내면에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이 가득했던 거다. 이제 보니 아버님의 유산은 외로움이다. 나는 앞으로 외로움을 밥 삼아 먹으며 씩씩해져야 한다. 외로움은 지엄한 밥과 함께 아날로그세대에서 끝날 수도 있는 대물림이다. 밥이 중하지도 않고, 혼자서 잘 노는 다음 세대는 삶의 표준이 다를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 외로움에 최적화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상처받을 것을 원천봉쇄하며 소통을 극소화하여, 한 겹 차단막을 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의사표시는 분명하게 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어쩌면 유전자 체계가 다를지도 모르는 이 신인류에게 라떼는 말이야 (나 때는 말이야)”를 거둬야겠다. 스마트하지 않은 것을 견디지 못하는 그들은 가차 없이 스마트폰으로 눈길을 돌릴 것이다. 아버님이 떠나시고 한 발 앞으로 다가선 내 위치를 가늠하며, 시간의 힘에 떠밀리면서도 놓지 말아야 할 것을 새겨본다.

신인류나 구인류, 모두 시간의 광풍 앞에 한낱 촛불이다.

 

<문학나무> 2020 겨울호, 통권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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