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 김명인 여우비 / 김명인 철둑 가장일 끌고 오는 여우비, 저물 무렵 잠깐 놀러 나온 구름이 길을 묶는다 만곡 끝 닿는 곳까지 갖은 파랑 펼쳐놓고 바다 한쪽을 후둘겨 소낙빌 털어내는 여우비, 한 풍경에도 이렇게 확실한 두 세계의 경계가 있다 나, 지금 물든 풍경의 틈새에 끼여 한켠으론 젖고, 한켠으론 메마.. 시 - 필사 2006.07.10
음지 식물 / 김명인 음지 식물 / 김명인 전정을 하지 말아야 할 곁가질 잘랐더니 감나무답지 않게 곧추 가지를 뻗어 그늘에 선 자목련을 메마르게 한다 어떤 나무는 애초 음지에서만 자라도록 마련된다, 현화 식물 저 노박 덩굴은 햇빛만큼 그늘도 잘 견뎌내지만 이런 정원에서 어린 묘목이 어떻게 가지 치고 열매 맺을까 .. 시 - 필사 2006.07.10
유효기간 '통조림보다 짧다. 사랑의 유효기간' 오랜만에 탄 전철에서 본 광고다. 어쩌면 당연한 이 말에 걸려 넘어졌다. 변화에 발 맞추지 못하는 이 아둔함이라니 ... 그런데 이 문구가 무엇을 광고하자는 것이었나 생각나지 않는다. ............과대포장의 虛와 實? Vincent van Gogh Bob Carpenter - Old Friends 충격 받은 채 .. 놀자, 책이랑 2006.07.10
그 여자 / 김명인 그 여자 / 김명인 그 여자 시장통 한 모퉁이에서 채소를 판다 아무려면 철따라 바뀌는 풀들 자라는 땅 이름 훤히 꿰고나 있는 듯, 그녀가 호명하는 무며 배추, 쑥갓 미나리 상추 함지에 담긴 시금치는 더 먼 곳에서 온 것이란다 종일 먼지를 뒤집어써야 하는 한 평 공터가 자식 셋 탈없이 키워낸 실한 모.. 시 - 필사 2006.07.10
붉은 산 / 김명인 붉은 산 / 김명인 나도 그 산 가까이 가본 적이 있다 바퀴에 진흙 덩이가 찰고무처럼 달라붙는 비포장도로를 지나 허물어지기 전에는 큰 절터였다는 작은 구릉을 건너가자 노란빛 하나도 더 물들 수 없는 잡목숲 사이로 붉은 산이 보였다 잎들이 염주 소리에 가까운 제 흙빛으로 지나가는 바람에 달그.. 시 - 필사 2006.07.10
安靜寺 / 김명인 安靜寺 / 김명인 안정사 玉蓮庵 낡은 단청의 추녀 끝 사방지기로 매달린 물고기가 풍경 속을 헤엄치듯 지느러밀 매고 있다 청동바다 섬들은 소릿골 건너 아득히 목메올테지만 갈 수 없는 곳 풍경 깨어지라 몸 부딪쳐 저 물고기 벌써 수천 대접째의 놋쇠 소릴 바람곁에 쏟아 보내고 있다 그 요동으로도 .. 시 - 필사 2006.07.10
실 족 / 김명인 실 족 / 김명인 그 작은 연못에서 그가 실족했으리라곤 누구도 믿지 않았다. 사체는 부패한 채 며칠 만에 떠올랐다 등에 거적때기를 대고 누워 노인은 이제 아무것도 버틸 것이 없다는 듯 검게 팬 눈으로 구름의 흰자위를 뿌옇게 걷어올리고 있다 평생을 힘들게 살아온 듯 거칠게 접힌 얼굴이며 목덜미.. 시 - 필사 2006.07.09
등 꽃 / 김명인 등 꽃 / 김명인 내 등꽃 필때 비로소 그대 만나 벙그는 꽃봉오리 속에 누워 설핏 풋잠 들었다 지는 꽃비에 놀라 화들짝 깨어나면 어깨에서 가슴께로 선명하게 무늬진 꽃자국 무심코 본다 달디달았던 보랏빛 침잠, 짧았던 사랑 업을 얻고 업을 배고 업을 낳아서 내 한 겹 날개마저 분분한 낙화 져내리면 .. 시 - 필사 2006.07.09
바닷가의 장례식/ 김명인 바닷가의 장례식 / 김명인 장례에 모인 사람들 저마다 섬 하나를 떠메고 왔다, 뭍으로 닿는 순간 바람에 벗겨지는 연기를 보고 장례식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우리에게 장례말고 더 큰 축제가 일찍이 있었던가 녹아서 짓밟히고 버려져서 낮은 곳으로 모이는 억만 년도 더 된 손금들, .. 시 - 필사 2006.07.09
오래된 사원1 / 김명인 오래된 사원 1 /김명인 사원을 지키던 수도승들은 이미 돌아갔다 무료와 허기에 기댄 이런 출분은 애초 내 뜻이 아니었다, 마음이 풍경을 얻어 스스로의 완성으로 나아간 흔적을 언제 발견했던가 부두 근처 열 병합발전소 굴뚝이 하루의 노역을 바다 쪽에서 육지 쪽으로 옮겨놓는 시간 창밖으로 보면 .. 시 - 필사 2006.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