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의 사랑 / 오탁번 그 옛날의 사랑 / 오탁번 지붕 위에 널린 빨간 고추의 매운 뺨에 가을 햇살 실고추처럼 간지럽고 애벌레로 길고 긴 세월을 땅 속에 살다가 우화 (羽化) 되어 하늘을 나는 쓰르라미의 짧은 생애를 끝내는 울음이 두레박에 넘치는 우물물만큼 맑을 때 그 옛날의 사랑이여 우리들이 소곤댔던 정다운 이야.. 시 - 필사 2006.07.15
學 樂 '애정, 너는 대체 무엇이길래 나를 이처럼 괴롭히니, 또 사람은 너를 도외시하고는 복락의 길을 얻을 수 없단 말이냐, 우리의 꽃다운 목숨을 통째로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치 그다지 존귀한 것이냐' '날 그리다 죽은 사람, 날 죽게 하는 님은 없는가.’ 굶은 짐승과 같이 고요하려하지 않는 애욕. 자유로.. 놀자, 책이랑 2006.07.12
기항지 1 / 황동규 기항지 1 / 황동규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들이 .. 시 - 필사 2006.07.12
즐거운 편지 / 황동규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 로움 속으로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 시 - 필사 2006.07.12
풍장27 / 황동규 풍장27 / 황동규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시 - 필사 2006.07.12
참을 수 없을 만큼 / 황동규 참을 수 없을 만큼 / 황동규 사진은 계속 웃고 있더구나 이 드러낸 채. 그 동안 지탱해준 내장 더 애먹이지 않고 예순몇 해 같이 살아준 몸 진 더 빼지 않고 슬쩍 내뺐구나! 이 한 곳으로 생각을 몰며 아들 또래들이 정신없이 고스톱 치며 살아남아 있는 방을 건너 빈소를 나왔다. 이팝나무가 문등(門燈).. 시 - 필사 2006.07.12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 서정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 서정주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 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 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날마다 칠해져온 것이라 하니 내 어 머니의 처녀 때 손때도 꽤나 많이 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 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 시 - 필사 2006.07.11
꽃 深淵 / 정현종 꽃 深淵 / 정현종 지난 봄 또 지지난 봄 목련이 피어 달 떠오르게 하고 달빛은 또 목련을 실신케 하여 그렇게 서로 목을 조이는 봄밤. 한 사내가 이 또한 실신한 손 그 손의 가운뎃손가락을 반쯤 벙근 목련 속으로 슬그머니 넣어습니다. 아무도 없었으나 달빛이 스스로 눈부셨습니다. 시 - 필사 2006.07.11
꽃 / 정 양 꽃 / 정 양 이쁜짓하는 아가야 바람이 인다 너 자라는 그늘에 바람이 인다 삼 년도 더 썩은 내 이빨 속 아프던 힘줄처럼 뽑아놓고 속을 수 있는 한 속아온 바람 모진 일 모질게 피어 한세상 가도가도 외롭더라 무슨 자랑 무슨 감격 무슨 슬픔으로 닮아 눈부시게 호젓하게 새로 피는 꽃 새로 또 피는 꽃잎.. 시 - 필사 2006.07.11
꽃 / 오봉옥 꽃 / 오봉옥 아프다, 나는 쉬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한때는 자랑이었다 풀섶에서 만난 봉오리들 불러모아 피어봐, 한번 피어봐 하고 아무런 죄도 없이, 상처도 없이 노래를 불렀으니 이제 내가 부른 꽃들 모두 졌다 아프다, 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 꽁꽁 얼어붙은 내 몸 수만 개 이파리들 누가 .. 시 - 필사 2006.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