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동네

자작나무 / 장인숙

칠부능선 2006. 6. 11. 08:44
 

            자작나무

 

 

    

         눈 덮인 자작나무 숲

         비스듬이 누운 산

         이마에 짧은 햇살을 걸고


         새들이 떠난 자리에

         나무는 바람을 가두고

         바람은 나무를 키운다


         벗은 다리 시려와

         허연 비늘이 되어도

         허락된 뿌리를 내린다

         어제의 바람은 어제를 벗고

         오늘의 상심은

         나무 사이에 걸린다.



  숲이 잠에서 깨어난다.

  아슬한 봄볕인가 어린 자작나무 눈 속에 감춘 발을 털며 일어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은 팔 벌려 소곤대며 눈맞춘다.  속이 들기 이른 자작나무들은 설레임으로 세월을 기다린다.

  샤모니의 자작나무는 겨울의 한가운데서 맑은 정신을 드러낸다.  눈 덮인 먼 산을 배경으로 든든하게 잘 생긴 나무가 말을 걸어온다.  대화를 시작하며 추억 속으로 데려간다.  오래된 괘종시계 아래 어린 날의 사진이 걸려있다.  단발머리 눈 맑은 소녀의 수줍은 웃음소리가 흩날린다.  그 시절 꿈도 화가가 되는 것이었을까.

  겨울강가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속삭인다.  스러지지 못하는 풀들은 앙상한 몸으로 한 줌 남은 햇살을 받고 있다.  반쯤 녹은 눈에 반사되는 저녁노을, 멀리 가야할 길과 지나온 길이 겹쳐진다.

  화가 장인숙에게 잡초는 없다.  하찮은 벌레도 없다.  움직이는, 움직이지 않는 모든 사물의 꿈을 헤아리는 따스한 눈길만 있을 뿐이다.  넉넉한 관조가 빛난다.

  이국적 분위기의 자작나무에는 반음이 없는 악기에서 무리하지 않은 반음의 연주를 듣는 여유로운 멋이 있다.  편안한 그의 그림에서 치열함을 안으로 삭인 무르익은 정서는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보는 이를 무욕의 공간으로 평온하게 이끈다.

  북구의 옛 사람들은 병이 나면 식사 양을 줄이고 숲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나는 마음에 병이 찾아오면, 버릴 것 다 버리고 의연히 서있는 황혼의 빛깔로 빛나는 가을의 자작나무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혼란으로 시끄러운 머리가 맑아지고, 허망한 욕망으로 애타던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 때까지 바라본다. 

  어느새 그의 그림은 나를 치유한다.

  무슨 사조(思潮)나 거창한 주의(主義)가 다가오지 않는 것은 겉치레에 이미 식상해 있기 때문이다.  표현과 이해의 사이에 거리가 없는 것으로 호감과 동류의식을 느끼며,  편안한 몰입의 즐거움에 빠진다.

  화가 장인숙의 진솔함에서 나오는 과장 없는 자연의 기운들이 흐려진 정신을 깨우며 따뜻하고 순수한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지치고 고단한 일상을 잊고 우리의 삶을, 그의 그림을 예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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