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나비야 나비야 / 강여울

칠부능선 2022. 11. 14. 18:46

강여울 선생은 아주 오래 전, 대구 문학행사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글이 좋아서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아주 갸날픈 몸매에 수줍은 모습, 눈빛이 따듯했다.

'묵은글이라 부끄럽지만

책갈피에서 떠오른 추억처럼

잠깐 미소지을수 있기를...'

다정한 저자 사인에 가볍게 책을 펼쳤다.

웬걸.. 바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1963년생, 나보다 한참 아래 연배인데 어찌 이렇게 살아냈는가. 장하다.

첫 작품 <귀천>은 치매 시아버지의 눈길을 따라간다. <등불> 외로운 시어머니의 마음을 훤히 뚫고 있다.

삶에 천착해서 풀어내는 게 수필이지만, 보이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에 머무는 게 또 수필이 아닌가.

경계를 넘어선 진솔함에 자주 울컥거리렸다. 아니 경이로움으로 고개를 숙인다.

오랜 '매듭'을 지었으니, 앞으로 가볍게 즐거운 시간을 누리시길... 

* 나는 아침마다 아버님의 수염을 깎아 드린다. 어쩌다 바빠 하루 이틀 쉬면 웃자란 풀처럼 전기면도기로는 잘 깎이지를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비누 거품을 발라 예리한 일회용 면도기를 사용한다. 이렇게 밀면 전기면도기로 한 것보다 면도한 자리가 훨씬 매끈하다. 면도를 하면 할수록 수염이 풀 같다. 어디에서고 뿌리내린 목숨이란 위로 솟구쳐 살려는 의지가 강한 모양이다. 아버님은 일상은 물론 대소변까지 옆에서 거들지 않으면 안 되는 치매 환자다. 그런데도 수염은 뿌리 내린 토양에 불평 없이 무성해지는 풀처럼 잘도 자란다.

(36쪽)

* 말과 몸짓의 합작으로 이루어지는 H선생님의 강의는 놓치는 것이 없고, 놓칠 수도 없다. 아무리 피곤한 저녁이라도 강의가 시작되면 흠뻑 몰입이 되고, 열정에 감전된 온몸의 신경 세포가 운동회라도 여는 듯 왁자해진다. 그 순간 나는 마술처럼 한 편의 글을 뚝딱 써내려 갈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에 찬다. (135쪽)

* 맞선을 보던 날, 마음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남편의 말을 능가하는 시부모님이 몸으로 한 첫말이 내 맘을 한 울타리로 들어서게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게 차비를 쥐어주는 시어머님, 손 한 번 잡아보자며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는 시아버님의 꾸밈없는 모습이 나를 감동시키는 첫말이었다. 울음으로 아들이 내게 보낸 첫말과 몸짓으로 보낸 시부모님의 첫말이 나에게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었듯이 요즘은 남편이 아침마다 수탉과 같은 첫말로 나를 깨운다. (148쪽)

* 정말 착하고 싶지 않은 내 맘 속에도 은행나무 같은 독기가 있어 이제껏 모진 세월을 잘 견뎌온 것이 아닐까. 착하지 않은 여자의 당당한 독기를 착한 여자는 안으로 쌓이는 숨은 독기로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벌레도 접근을 꺼리는 은행잎 같은 부드러운 미소 속에 온몸을 쥐어짜는 안간힘의 독기, 그것이 착한 여자를 지키는 힘이 아닐까. 하늘을 향해 곧게 뻗는, 은행나무에서 내려온 바람이 착한 나를 어루만진다. 마음이 찌르르 전율한다. (198쪽)

​* 새 구두를 처음 사 신었을 때 발에 물집이 생기고, 피부가 상하는 아픔을 참고 견디는 동안 발에 맞춰 편안하게 낡은 구두에 정이 간다. 남편과 나의 모습도 기우뚱 한쪽이 불안해 보일 때가 많을 것이지만 그때마다 한 쪽이 중심을 잡고 있어서 오늘 하루도 감사한 마음으로 접을 수 있는 것이리라. (212쪽) 

 

 

 

  이렇게 불편한 것을 새 구두의 당연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면 산 시간이다. 이 지고의 시간을 공감하는 세대에게 의미깊은 사건들이다. 지금은 새 구두도 불편하면 안 된다. 신는 즉시 안락하게 안기는 구두를 찾는다. 

  사라져가는 마음이라 더욱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