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메타에세이 / 박양근

칠부능선 2022. 11. 17. 14:54

문학 오디세이를 위한 <메타에세이>는 박양근 선생님 최근작이다.

오래 탐구하고 연마한 내용을 앉아서 편하게 받아 모신다. 변함없는 수필 사랑 충만하신 모습에 경의를 보낸다. 

자주 끄덕거리며, 반가운 이름들을 만난다. 일면식 없이 나 홀로 좋아하던 작가와 철학자들을 만나 또 혼자 들뜨기도 한다. 

오랜만에 푹 빠져 읽으며 자세를 바로 잡는다. 

 

 

 

*프롤로그

 

 나, 그대, 우리는 글을 쓴다. 작가로서 살기 위하여

 

사람은 태어나면서 작가다. 그는 세상이 들어온 느낌을 울음으로 표현하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리는 방법과 공간을 지니기 시작한다. 한해 한해가 지나면서 표정과 손짓과 발짓으로 기쁨과 슬픔을 말한다. 더욱 성숙하면 말을 배우고 글이 자신의 표현방식임을 알아차린다. 청춘의 아픔과 어른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련을 치유하는 방법도 언어로 익힌다.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는 눈물 한 방울과 조용히 떠올랐다 사라지는 미소의 뜻을 알 때쯤이면 머리카락이 가을바람에 나붓대는 나이가 된다.   

 

 

* 조물주는 인간에게 평생 사용해도 다 쓰지 못하는 머리와 가슴을 주었다. 두뇌는 익히는 신체이며, 심장은 느끼는 신체이다. 선조들이 행한 독서법 중에 머리와 가슴을 틔우는 인성구기因聲求氣가 있다. 글을 소리내어 읽으면 문리가 '탁' 터지는 것이니 '독서백편의자현'에 다다랐다는 신호다. 연암 선생은 "선비 아닌 사람이 없지만, 능히 바른 자가 드물다. 누구나 책을 읽지만, 능히 잘하는 자는 드물다."라는 말을 남겼다. 올바른 독서를 하는 사람에게 책은 자비를 베푸는 것을 잊지 않는다. 책은 자신을 읽어주는 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20쪽)

 

* 문학의 개선은 문제점을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한국수필도 개인 취향, 수필의 여성화와 노령화,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간격, 전자매체와 영상 이미지의 확산에 대처하는 방식에 따라 그 명운이 좌우된다. 해결책은 작품에 무슨 이름을 붙이느냐가 아니라 어떤 수필을 쓰는 수필가 본인에게 있다. 이것이 21세기 한국수필이 새롭게 정리해야 할 논제이다.

(119쪽)

 

*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이 일관되게 던지고 있는 질문은 "나는 나를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가?"이다. 이 요청에 대한 해결방법은 결국 인식이 아니라 행동이고 이기심이 아니라 배려심이다. 문학이 추구하는 것도 자기 힐링과 타자에 대한 배려이다. 내가 채워져야 세상이 채워진다는 역설은 종교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파르헤지아 parrhesia'라는 말이 있다. '질실을 말하는 용기'를 뜻한다. 고대부터 종교가와 철학자들은 파르헤지아를 중요한 실천적 덕목으로 가르쳤다. 사람은 누구나 진실을 말하고 행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침묵하기 쉽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한 사회 모두가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깨달으면 계산에 앞서 진실을 향한 용기를 갖게 된다. 

(126쪽)

 

* 작가와 낙타는 함부로 무릎을 꿇지 않는다. 제 등에 짐을 얹을 때만 무릎을 꿇는다. 제 몸을 사막에 앉혀도 눈은 스핑크스처럼 지평선을 응시한다. 작가도 그래야 한다. 낙타와 달리 작가가 무릎을 꿇는 상대는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무언가를 써야겠다는 강렬한 의지, '이건 나만이 쓸 수 있어!"라는 순수한 목소리에 귀의하는 것이다. (195쪽)

 

* 한번 죽자고 해보자 

글도 전쟁이고 싸움이다. 살려면 기습전과 장기전과 돌격전과 배수전에서 이겨야 한다. 글만큼 교활하고 변덕스럽고 음흉한 적이 없으므로 '죽느냐 사느냐'에 가까운 오기를 부려한 한다. 《자본론》의 저자 마르크스는 "가장 급진적으로 된다는 것은 사물을 근원으로부터 파악한다는 것이고, 이 근원이란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이다" 라고 했다. 오죽하면 나탈리 골드버그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고 햇겠는가. 쓰지 않으면 죽는다는 각오, 한 단어를 찾기 위해 밤을 새우는 집요함, 하나의 적절한 단어를 찾으면 '유레카'라고 외치면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광기. 맨몸으로 글의 적진으로 돌격하는 결사의 정신, 그렇게 하려면 글을 씀으로써 쓰는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264쪽)

 

* 힐링문학은 문학성이나 '글쓰기 재능'과는 상관이 없다. 나에게도 '아픔이 있구나'를 자각하고 '정말 말하고 싶다'는 생각만있으면 된다. 인생과 수필을 비교하면, 밑그림은 인생이고 수필은 그 위에 그려진 윗그림이다. 힐링이라는 여과 장치로서 문학은 오직 진실해지고 싶다는 내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88쪽) .

 

 

 

* 에필로그

 

그때도 지금도 제대로 쓰지 못하여 날마다 걷는다.

 

모래 위에 글을 쓰고 지우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웬만하면 한 권의 책을 갖는 시절이 되었다. 그렇더라도 누구든 마음이라는 글판이 닳도록 쓸 수는 없다. 어머니 품속에 안기고 자랑하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동서 철학자의 얼굴 주름에 감동한 때가 없다면 어찌 책을 일고 글을쓰는 시절이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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