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인생의 역사 / 신형철

칠부능선 2022. 11. 28. 20:36

신형철 신간 알림을 보고 바로 주문했는데... 오래 읽었다.

이십수 년 동안 문학을 공부하면서도 자신감을 잃고 주눅이 들 때마다

'시는 나를 사랑한다. 시가 나를 사랑한다' 고 최면을 걸듯이 속으로 말했다고 한다.

지금 내게도 이런 세뇌가 필요하다. 그럼, 그럼 ~

'시를 겪는다' 그래서 시인인 거다.

"내가 조금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겪으면서, 알던 시도 다시 겪는다. 그랬던 시들 중 일부를 여기 모를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이 책의 가장 심오한 페이지들에는 내 문장이 아니라 시만 적혀 있을 것이다. 동서고금에서 산발적으로 쓰인, 인생 그 자체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 - 책머리글 중에서

* 공무도하가

백수광부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었으니,

장차 임을 어이할꼬.

(32쪽)

나는 오랜만에 이상은이 부른 '공무도하가'를 찾아서 한참 들었다.

슬픔에 빠지기 좋은 노래다.

*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발표된지 10년도 안 된 이영광의 <사랑의 발명>을 천년된 시처럼 아득한 마음으로 읽어보는 때가 나에게는 있다. 이 시가 동시대의 어느 저녁 술집에 마주앉아 절박해져 있는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먼 과거의 어느날 무정한 신 아래에서 마침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의 이야기처럼 보여서다. (93쪽)

*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황동규

부동산은 없고

아버님이 유산으로 내리신 동산 상자 한 달 만에 풀어보니

마주앙 백포도주 5병,

호주산 적포도주 1병,

안동소주 400cc 1병,

품 좁은 가을꽃 무늬 셔츠 하나,

잿빛 양말 4켤레,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

가족 모두 집 나간 오후

꼭 끼는 가을꽃 무늬 셔츠 입고

잿빛 양말 신고

답답해 전축마저 잠재우고

화분 느티가 다른 화분보다 이파리에 살짝 먼저 가을물 칠한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심란蘭 꽃을 쳐다보며 앉아 있다

조그많고 투명한 개미 한 마리가 심란 줄기를 오르고 있다

흔들리면 더 오를 생각 없는 듯 멈췄다가

다시 타기 시작한다

흔들림, 멈춤, 또 흔들림, 멈춤

한참 후에 꽃에 올랐다

올라봐야 별볼일 있겠는가,

그는 꼿꼿해진 생각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다.

저녁 햇빛이 눈 높이로 나무줄기 사이를 헤집고 스며들어

베란다가 성화 속처럼 환해진다.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어느샌가 심란이 배경 그림처럼 사라지고

개미만 투명하게 남는다.

그가 그만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135쪽)

* 한 인간의 육체를 지탱하는 것이 밥이라면 정신을 북돋우는 것은 인정認定이다. 서구의 석학들이 한 말인데 기꺼이 동의하는 편이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우리를 평생 놓아주지 않는 물음은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이고, 그 물음은 깊은 곳에서 '나는 네가 욕망할(인정할) 만한 사람인가?'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저 물음에 '그렇다'라고 답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삶은 지독히 '외로운 사업'이 되고 만다. (138쪽)

* 나는 너다 44

황지우

1980년 5월 30일 오후 2시, 나는 청량리 지하철 플랫폼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을 보았다. 그 문에 이르는 가파른 계단에서 사람들은 나를 힐끗힐끗 쳐다만 보았다. 가련한 지고, 서울이여 너희가 바라보는 동안 너희는 돌이 되고 있다. 화강암으로 빚은 위성도시여, 바람으로 되리라. 너희가 보고 만 있는 동안.

주주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웁시다. 최후의 일일까지!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내 소리를 못 듣느냐?

아, 갔구나, 갔어. 석고로 된 너의 심장을 내 꺼내리라.

나에게 대들어라. 이 쇠사슬로 골통을 패주리라.

왜 내가 너희의 임종을 지켜야 하는지! 잘 가라, 잘가라.

문이 닫히고 나는 칼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 갔다.

파란 유황불의 화환 속에서 나는 눈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몸이 없어지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부끄러움의

재 한 줌.

* 1980년 5월, 황지우(본명 황재우, 당시 29살)는 서울에 있었다. 1952년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란 그는 1972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 이듬해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동하여 강제 입영됐다가 1976년 복학한 터였다. ...

그의 형제 중 셋째였다. 그보다 14살 많은 맏형 황승우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는데 독학으로 광주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다니던 아우 황광우는 지명수배중이어서 행방을 알 수 없었다. ...

큰형의 증언이다. "5월 광주항장 현장에서 광주시민들이 취재 나온 외신기자들에게 통역해줄 이를 찾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통역에 나섰다. 통역 도중 나는 시민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지금 상무관 안에 시신들이 놓여 있다고 합니다. 나와 외신기자들을 상무관으로 안내해주세요. 이들에게 계엄군의 만행을 보여줘야 합니다. " 그가 번역해준 내용이 <뉴스위크>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국내에서 광주는 철저히 고립돼 있었다. 서울의 황지우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으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5월 30일 그는 '땅아 통곡하라'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만들어 가방에 담고 집을 나섰다....

"나는 종로에 뿌렸고 청량리 지하철에서 체포되어 합수부에 끌려갔다." .. 계엄합동수사본부가 지휘하는 밀실에서 황지우는 그해 여름을 보내게 된다.

" 단성사 극장 앞에 나가 유인물 몇 장 뿌린, 이 초라한 사건은 김대중 내란 음모와 관련된 도심지 폭동 사건으로 위조되어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고문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육체가 있다는 사실을 저주하였고 친구를 무고하는 허위 자백을 하고 만다....

...그의 큰형이 훗날 '영어 잘하는 스님'으로 화재를 모은 황혜당 스님이라는 사실과 노동운동가로 한 시대를 살아낸 황광우가 지금은 인문학 저술가로 활동중이다.

.... 이 시가 '부끄러움'으로 끝난 것을 시인 자신은 납득할지라도 한국시사는 납득하지 못한다. (183쪽)

* 산문시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에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노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 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 소리 춤 사색 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톳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삽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라가더란다. (197쪽)

* 불행은 이제 겪을 만큼 겪었다. 우리는 저 '아름다운 석양의 나라'로 가야 한다. (202쪽)

* 봄밤

김수영

* 여럿이 마시는 사람은 희망이 소중하다고 맏는 사람이고, 혼자 마시는 사람은 절망이 정직하다고 믿는 사람일까. 전자가 결국 절망뿐임을 깨달으면 귀가하다 혼자서 한잔 더 할것이고, 후자가 끝내 희망을 포기 못하겠으면 누군가를 불러내 한잔 더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신 것이 희망이건 절망이건, 자고 일어나면 남아 있는 것은 부끄러움뿐일 때가 있다. (226쪽)

 

책 속에 박서보 그림카드를 넣었다. 신형철의 육필이겠지. 그의 마음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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