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빛나는 말들 / 김미원

칠부능선 2022. 11. 27. 17:05

김미원 선생이 그동안 한 인터뷰 글을 모아 <인터뷰 에세이>를 묶었다.

<에세이플러스> 후에 <한국산문>이 된 월간지- 창간호부터 정기구독을 했으니, 다 만났던 글인데도 새롭고 반갑다.

김미원 선생은 오래 전, 인도기행을 함께 갔었다.

다감하면서도 조용한 카리스마로 전체를 편안하게 이끌었다. 그때 호감이 시작되었다.

나는 읽던 책을 미루고 푹 빠져서 읽었다.

첫 인터뷰가 나온 잡지 <에세이플러스> 2006년 7월호, 기억이 선명하다. 장사익 인터뷰가 특히 좋았다.

그 후 <한국산문> 연말모임에서 장사익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바로 곁에서 노래도 두세 곡 감탄하면서 들었다.

마지막이 2022년 9월호 김사인 시인이다. 한참 전, 세 번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QR로 어눌한 시인의 육성을 들었다.

과작에 수줍은 인상의 김사인 시인, 그냥 수줍은 게 아니다. 곧은 정신의 뼈가 하얗게 얼비치는 시에 가슴이 싸아해진다.

몇몇 슬몃 웃음지어지는 대목이 있어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음 시집을 기다리는 시인이다.

인터뷰이들의 진수를 끌어낸 격조있는 인터뷰다.

그야말로 '빛나는 말들'을 소환해 준 용기에 경의를 보낸다.

* 장사익

한복이 잘 어울린다고 했더니 장모님이 동대문 포목점에서 광목, 모시 떠다 만들어 풀 먹이고 다림질해 주신 옷이라며 쑥스럽게 웃는다.

병풍에 쓰인 '백년가약서'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 고완선과 땅 장사익은 금후 100년 동안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 늘 행복함을 유지시킨다는 약서를 씁니다. 단, 100년 후에는 영원으로 계약조건을 변경합니다." 부부의 자필 서명도 새겨져 있다. 엄마가 "워째 니가 땅이여" 하자 "얼라, 잘못 썼네." 하고 눙치며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 그는 놀이판인 인생에서 죽을 때가지 더 후미지고 각광받지 못한 시를 찾아 매미처럼 어릿광대처럼, 브에나비스타소셜클럽처럼 노래하고 싶다는 천생 소리꾼이다. (19쪽) <에세이플러스> 2006년 7월호

* 문정희

나는 미당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시를 갖다 드리고 무엇을 지적받고 한 것은 없었어요. 그냥 숨 쉬는 거, 그런 거를 배운 거 같아요. 그런데 언젠가 선생님께서 '벌써 사람을 속일 줄 아는구나' 그러시면서 야단을 치신 게 기억나요"

... "이런 인터뷰가 맘에 들어요.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지 않는데 분위기가 좋아서 많은 말을 하게 되네요." 그녀의 솔직함과 진지함에 감동이 느껴졌다. 수상에도 연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곧바로 "절대로'라는 답이 돌아왔다. (138쪽) - <한국산문> 2010년 10월호

* 윤형두

고인이 된 친구 정을병은 윤형두를 모델로 <철조망과 의지>라는 작품을 썼다. 작품에 윤형두 실명을 그대로 쓰며 그를 정의로운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래서 내가 꼭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랬지요. 그런데 그게 족쇄가 된 거 같아요. 법정이가 '윤 사장, 나는 <무소유> 한 편에 내 인생이 얽매였다. 무소유처럼 살려니까 내가 꼼짝달싹하지 못해. 그랬듯이..... 그러면 나는 '무소유 때문에 당신 이렇게 유명하게 된 거야' 라고 그러면. '맞아' 그랬지요." (183쪽) <한국산문> 2012년 3월호

* 강인숙

" 할아버지 때부터 집안이 크리스천이었어요. 하지만 나는 자퇴생입니다. 고등학교 때 자퇴했어요. 전지전능함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신이 전능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니 상관없어요. 신이 전능하다면 아이들이 죽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선 안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찬송가를 많이 불러요. 우리 집에는 노동요가 찬송가였으니까 밥하면서도, 풀 뽑으면서도 찬송가를 부르는 거죠. 십계명도 다 지키구요. 하지만 나는 휴머니스트 쪽이지." (261쪽)

.... 헤어짐이 갑작스러워 나는 선생을 꼭 껴안았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 험난한 세월을 겪은 세대로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선생에게 보내는 존경과 감사와 연민의 표시였고, 내 방식의 인사였다.

우리 모두는 자기 방식대로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사랑하고 신을 믿는다. 선생 역시 그녀 방식대로 충실히 살았고, 또 살고 있다.

(269쪽) <한국산문> 2019년 6월호

* 이시형

지금도 매일 글을 쓴다는 선생에게 좋아하는 작가를 물었다.

" 어네스트 헤밍웨이예요. 그가 간 곳은 거의 다 갔어요. 쿠바, 키웨스트, 시카고 등, 거의 간 것 같아요. 헤밍웨이 문장이 굉장히 간결해요. 글은 독자를 못 믿으면 문장이 길어져요. 시원찮은 작가들은 독자들이 오해하면 어떡하지 하면서 문장이 자꾸 길어져요. 나는 그게 그렇게 싫더라구요. 문장의 흐름, 호흡, 리듬을 굉장히 중시해요." (301쪽) <한국산문> 2021년 6월호

* 김사인

평생 시 쓰기와 가르치는 일만 한 사람으로 언제부터 시 쓰는 사람으로 인식했는지 묻자 정말 예상치 않은 답이 돌아왔다.

" 안 해본 것 같습니다. 예, 그러니까 그런 자신감도, 자기 긍지도 아직 충분치 않다고 그러는 게 맞을 거 같습니다. 시집도 어쩌다 보니 세 권이 있는 거고, 제 자신을 누가 시인이라고 말하면 낯이 붉어집니다. 저를 소개할 때 글 질을 조금씩 하는 건달입니다. ...."

시인의 정도를 넘은 겸손에 나는 조금 기가 질렸다. 좋은 시가 정말 많다고 하자 목소리가 커지며 깜짝 놀라듯 말을 이었다.

" 아, 그건 나는 모르겠어요. 나는 내 시에 대해 한 번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 그냥 전전긍긍합니다."

시인은 평소에 잘 우는 게 시 詩라는 거라 했다. 둔감해서는 울 수 없고 내면적 분노, 설움, 기쁨 등에 섬세하고 예민한 떨림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도 했다.

(311쪽) <한국산문> 2022년 9월호

책 정리를 엄청 했는데 이 책이 살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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